“1950년 6월 25일 내가 전한 소식은 방송생활 25년여를 통틀어 가장 불행한 뉴스였습니다.”
22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만난 재미교포 위진록 씨(89·사진)는 6·25전쟁 발발 당일을 떠올렸다. 6·25전쟁 67주년을 앞두고 국가보훈처 초청으로 방한한 위 씨는 북한이 38선을 넘어 기습 남침한 상황을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민에게 처음으로 알린 전직 중앙방송국(현 KBS) 아나운서다.
위 씨는 당시 상황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숙직 중이던 그는 오전 4시가 조금 넘어 한 군인이 긴박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군인은 “지금 북한군이 쳐들어오고 있다고 방송하라”고 했다. 위 씨는 사태를 실감하지 못한 채 “아침 방송이 6시 반이어서 방송을 할 수 없다”고 답했다. 그러나 곧 개성이 함락됐다는 정보가 들어왔고, 오전 6시 반 방송을 시작했다. “임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북한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그는 “뭔가 더 말해야겠다는 생각에 한 말이 있었는데 ‘국군은 건재합니다.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였다”며 “우리 군이 열세이니 빨리 피란을 가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북한은 개전 초기 압도적 전력으로 밀어붙였다. 한 예로 북한은 전투기 등 항공기 226대로 공격했지만 우리 공군은 전투기가 없어 연락기 등 22대로 맞섰다. 위 씨는 “‘안심하라’는 말이 최선이었다”고 회고했다.
서울이 함락된 6월 28일부터는 도피 생활을 했다. 북한군이 그가 근무하던 서울 정동 방송국을 점령한 뒤 “전향서를 쓰고 북한을 위한 방송을 하라”고 강요한 것. 위 씨는 ‘허위 전향서’를 써 안심시킨 뒤 도망쳤다. 그는 “집 대청마루 밑을 깊게 파서 숨어 지냈고, 친척집 등을 떠돌았다”고 말했다.
서울을 수복한 9월 28일 그는 숨어있던 친척집에서 한달음에 달려 나왔다. 마포에 임시 스튜디오를 마련해 들뜬 목소리로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여기는 서울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찾았습니다”라고 전했다. 위 씨는 “그날 가장 기쁜 방송을 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엔군 총사령부에서 라디오 방송을 했다. 곧 전쟁이 끝나 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란 기대와 달리 전쟁은 계속됐다. 일본 생활은 길어졌고 주일미군에서 총 22년간 대북 방송을 했다. 1972년부터는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하고 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가장 불행한 소식과 가장 기쁜 소식을 번갈아 전했던 그는 북한이 핵 협박을 일삼는 지금이 67년 전 6·25 발발 전 상황 같다고 했다. 그는 “북한이 지금도 한국을 제 것으로 만들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하다”고 말했다.
젊은 사람들이 자신이 목격하고 알린 6·25를 잊는 것에 대해선 우려했다. “6·25를 잊는 건 국민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근원인 6·25를 기억해야 합니다. 잊지 않기 위해 저도 한국에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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