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되는’ 분야로만 몰려… 기초의학 전공자는 ‘천연기념물’

전주영기자 , 차길호기자 입력 2016-10-03 03:00수정 2016-10-03 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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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엄 리포트/기초 허약한 한국 과학계]1등만 모인 의대, 초라한 연구성적 왜 ☞ 2009~2014년 기초학문 대학 세계 랭킹

최첨단 융복합 연구 프로젝트에 착수한 고려대 의료원 융복합의료센터 연구원들. 이처럼 상당수 의과대학과 소속 병원들이 ‘연구 중심 의대·병원’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 의대생들 대부분은 진료 중심의 임상의학 분야를 전공으로 택한다. 동아일보DB
 “의대에서 기초의학을 지망하면 ‘천연기념물’이라 불린다. 비싼 학비 내며 죽어라 공부했는데 결국 굶어 죽을 게 눈에 뻔하기 때문이다.”

 고교 시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서울 소재 의대 재학생 전모 씨(22)는 원래 기초의학을 공부해 난치병 치료법을 개발하는 학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의대 입학 후 상황을 파악해 보니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전 씨는 “기초의학을 하면 기본적으로 보수가 짜다. 대학 동기들과 똑같이 공부하며 고생했으니 억울해서라도 그냥 돈이나 많이 벌며 살아야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라고 말했다.

 한국연구재단과 본보 기획팀이 톰슨로이터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의학 분야 연구력에서 한국 유수 대학들의 위치는 300위권에도 들지 못했다. 2014년 기준으로 국내 1위인 울산대는 세계 랭킹 346위에 그쳤다. 국내 2위인 서울대는 358위, 3위인 연세대는 460위였다. 국내 최상위권 수재들이 몰리는 한국 의대가 내놓은 충격적인 성적이다.

○ 최고 수재들만 갔는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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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최고 수재들을 모아 가르치는 국내 의과대학 교육의 현주소는 사실상 주입식 암기와 단순 손기술 전수를 통해 ‘의학 기술자’를 만드는 과정으로 전락했다. 서울대 의대의 경우 매년 150명 안팎이 졸업하지만 기초의학을 진로로 택하는 학생은 2, 3명 정도에 그친다. 처음 입학한 예과 학생들은 적지 않은 수가 기초의학 분야에 흥미를 느낀다. 하지만 6년 뒤엔 대부분 소신을 접고 성형외과를 비롯해 고수입이 보장되는 분야의 의사로 진로를 택하고 있다.

 이진석 서울대 의대 교수가 8월 발표한 2013년 전국 의대생·의학전문대학원생의 전공 선호도 설문조사에 따르면 기초의학 전공을 선호한다고 답한 학생은 단 2%에 그쳤다. 나머지 98%는 임상의학을 택했다.

 이런 현상은 결국 돈 때문이다. 기초의학을 전공해 연구자가 되면 연구 환경도 좋지 않은 데다 기본 수입이 의사의 3분의 1 수준이다. 의대에서는 “뛰어난 두뇌, 고고한 소신, 무엇보다 부모님의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기초의학을 할 수 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최민호 서울대 의대 기생충학교실 교수는 “졸업생 중 기초의학 연구를 하고 싶어도 연구 환경을 보고 포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며 “입시 결과 최상위 학과에서 비롯된 자부심도 경제적 여건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교수도, 전공 학생도 없는 악순환

 의대생의 기초의학 기피 현상은 학문 연구뿐만 아니라 후배들을 가르칠 교육인력의 ‘구인난’으로 이어지고 있다. 서울대 법의학교실은 자타가 국내 최고 권위를 인정하지만 의대 졸업생은 1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실정이다. 기생충학 미생물학 등 다른 기초의학 분야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이렇다 보니 기초의학 분야 교수진에는 의학이 아닌 생명과학 등을 전공한 교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서울의 한 의대 교수는 “의학적 시야를 갖고 있는 교수들이 줄어들면 기초의학 교육 자체가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수업시간에도 은근히 “기초의학교실 교수가 되면 어떻겠느냐”는 식으로 홍보를 하지만 의대생들의 반응은 미지근하다. 의대생 임모 씨(24)는 “예방의학 병리의학 등 기초의학 교수님들이 수업시간에 은근히 학생을 모집하는 발언을 한다. ‘지원자가 없는데 오면 잘해주겠다. 거의 교수직이 보장된다’고 하시지만 우리는 임상의학을 해서 의사가 되는 것보다 ‘비전’이 없다고 생각해 귀담아듣지 않는다”고 말했다.

○ ‘의사 과학자’ 양성해야

 물론 한국 의학은 심장과 위, 뇌 분야 등 임상 의술에서는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새로운 첨단 의료기술은 기초의학의 토대 위에서 발전하기 때문에 능력 있는 기초의학자를 양성하는 것은 선진 의료국가로 가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전문가들은 기초의학 연구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연구 중심 의학자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예컨대 대학별로 ‘의사과학자 양성 프로그램’을 만들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미국 의과대학은 진료 위주 의사 교육과 연구 중심 의학자 교육으로 미션과 학제가 특화 운영된다. 이에 따른 예산과 인력 투입도 다르다.

 한 국공립대 의대 교수는 전국의 의대를 진료 중심 의대와 세계적 수준의 창의적 연구개발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 중심 의대’로 분류해 보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연구 중심 의대는 의무적으로 신입생의 일정 비율을 의사과학자로 양성하도록 해야 한국 의학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윤성 서울대 의대 법의학교실 교수는 “낮은 수입도 문제지만 기초의학 연구자에 대한 장기적 투자와 연구 자율성을 보장해줘야 인재들이 기초의학에 관심을 가진다”고 말했다.

 의사과학자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인식을 제고하는 것도 앞으로의 과제다. 김기수 울산대 의무부총장은 “의대생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돈을 벌기 위한 의사가 되는 것보다 연구 업적을 내는 의사가 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 어떻게 조사했나 ::
 
인프라 - 평판은 빼고 논문만 비교… 순수 연구실력 첫 평가
 
 한국연구재단과 본보의 분석은 학교의 인프라나 국제적 평판이 중심이 되는 기존 대학평가들과 달리 논문 피인용 현황만을 활용해 순수하게 연구자·연구기관의 연구력을 평가한 것이다. 세계적 연구에 기여도가 높은 논문을 분석해 한국 연구자와 연구기관의 위치를 평가한 첫 분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기본 자료는 세계적인 학술정보 제공 기관인 톰슨로이터가 학술적 기여도가 높은 논문만 엄선한 ‘WoS CC(Web of Science Core Collection)’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했다. 이를 바탕으로 데이터베이스에 등재된 2009∼2014년 발행 논문 중 피인용 횟수가 많은 상위 10% 논문을 대상으로 분석했다. 순위를 매길 때는 단순히 발행한 논문이 많거나 인용이 많이 된 것만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피인용 횟수를 논문 수로 나눠 ‘연구력’에 초점을 맞췄다.
 
차길호 기자 kilo@donga.com·전주영 기자
#의대#기초과학#논문#기초의학#전공#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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