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경준]산토끼가 선량을 고르는 한 가지 방법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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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준 사회부장
정경준 사회부장
3년 넘게 쓰던 휴대전화를 바꿨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주소록, 사진, 동영상, 메시지, 일정 따위를 옮기려는데 번번이 오류가 나 결국 실패했다. 메시지나 일정이야 수작업으로도 가능했지만 문제는 주소록이었다. 2580명의 연락처를 손으로 베끼는 건 엄두가 안 났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나 클라우드(cloud)에 남은 연락처를 일부 이식했지만 불완전했다.

당장 ‘소통’이 힘들어졌다. 잘 아는 사람일 것으로 추정되는 누군가가 “난데, 그날 올 수 있지?”라 물으면 어색하게 “실례지만 누구세요?”라고 되물었다. 반대로 내가 먼저 연락하려면 가족이라 해도 전에 쓰던 휴대전화에서 일일이 주소록을 찾아야 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옛 기기에 저장된 이름들을 하나하나 찍으며 그 주인을 떠올렸다. 나는 명함을 받으면 조금이라도 기억할 수 있도록 일일이 손으로 입력하곤 한다. 특히 e메일 ID가 특이하면 도움이 된다. 예컨대 나이 지긋한 분이 ‘○○○○58@XXXXX.com’이라는 ID를 사용하면 ‘58년 개띠인가 보다’ 생각하며 머릿속 저장장치에 담는다.

방향은 부정적인 쪽이지만 가장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는 부류는 명함에 휴대전화 번호가 없는 사람들이다. 백번 양보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할 만한 장관, 국회의원, 광역자치단체장, 연예인 등 외에 장삼이사(張三李四)도 왕왕 있다.

오랜만에 만난 초등학교 친구가 그랬다. 지방법원 부장판사를 끝으로 법복(法服)을 벗고 변호사 개업한 그 친구의 명함에는 휴대전화 번호가 없었다. 이유를 묻자 “아이고 귀찮아서. 이런 일 하다 보면 골치 아픈 일이 얼마나 많은데…”라며 손사래를 쳤다. “어찌 됐건 네 앞길에 돈다발이 쫙 깔리기를 바랄게”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이젠 너도 갑(甲)이 아닌데,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래?’라고 충고해주고 싶었다.

일전에는 모 대학 대외협력처장과 명함을 주고받았다. 대학 대외협력처장은 기업으로 치면 홍보실장과 같다. 정부, 국회, 언론, 시민단체 등 외부와 소통하면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대학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자리다. 그런데 그의 명함에도 휴대전화 번호가 없었다. 심지어 휴대전화 번호를 담은 명함, 뺀 명함을 다 갖고 다니며 상대에 따라 어느 것을 건넬지 ‘간’을 보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명함에 휴대전화 번호가 없는 사람들을 추려보니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나도, 그도 연락 한번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나에게 왜 연락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안 한 이유는 분명하다. 소통하기 싫어 휴대전화 번호를 가르쳐주지 않는 사람에겐 마음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내일은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일이다. 후보마다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지역 주민, 또 국민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 소통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이맘때 아니면 받아보기도 힘든 그들의 명함에는 인자한 얼굴 사진, 자랑스러운 학력과 경력, 지키지도 못할 공약이 빽빽하지만 휴대전화 번호를 넣은 후보는 손에 꼽을 정도다.

선거운동이 막판으로 치달으면서 집토끼(지지층), 산토끼(부동층)라는 말이 유행이다. 전국의 산토끼들과 선량(選良)을 고르는 한 가지 방법을 공유하고자 한다. 길거리에서 받은 후보 명함을 아직까지 쓰레기통에 넣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꺼내보시라. 혹시라도 휴대전화 번호가 있는 후보를 발견했다면 딱히 지지하는 정당도 없고, 공약도 거기서 거기라면 그 후보를 찍으시라. 비록 그가 당선된 뒤 당신이 연락했을 때 “실례지만 누구세요?”라고 딴소리를 하더라도 적어도 소통의 필요조건이 뭔지는 아는 사람일 테니….

정경준 사회부장 news91@donga.com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휴대전화 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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