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바꿔치기 ‘유령수술’에 메스 댄 檢… 사기죄 첫 기소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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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의사’ 내세워 성형환자 모은뒤… 마취 상태서 치과의사가 수술
40대 병원대표 계약서로 들통

큰 광대뼈가 고민이었던 김모 씨(28·여)는 2013년 9월 중순 서울 강남의 그랜드성형외과를 찾았다. “안면 윤곽으로 유명한 B 원장님을 배정해 주겠다”는 상담실장의 말에 김 씨는 나흘 뒤로 수술 날짜를 잡고 수술비로 780만 원을 건넸다. 수술 당일 마취 직전 B 원장이 왔다는 것. 전신 마취를 했던 김 씨의 기억은 딱 거기까지다.

한쪽 뺨만 부기가 안 빠져 문의했더니 ‘2년 정도는 더 기다려 봐야 한다’는 병원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게 2년이 흐른 지난해 9월경 재수술을 고심하던 김 씨는 대한성형외과의사회로부터 “B 원장이 ‘치과의사에게 수술을 맡겼다’는 양심고백을 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TV 속 남의 일인 줄만 알았던 ‘유령수술’의 피해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치과의사가 수술하는 줄 알았다면 다른 병원을 선택했겠죠.” 김 씨는 광대 축소 수술 후 3년이 지난 현재 개구(開口) 장애(턱이 벌어지지 않는 증세)를 겪고 있다.

성형외과 의사에게 믿고 맡긴 성형수술을 엉뚱한 의사에게 받은 환자는 김 씨뿐만이 아니었다. 본보가 입수한 B 원장의 자술서에 따르면 B 원장은 병원장 지시에 따라 턱·광대 축소 수술 등 수십 건을 치과의사 A 씨 등에게 맡겼다. 환자가 전신 마취되면 ‘섀도 닥터(대리 의사)’들이 수술을 집도하고, 환자가 마취에서 깨어나면 다시 나타나는 식이었다. 그는 “섀도 닥터와 서로 근무지가 달라 환자를 수술실에 들여보낸 뒤 다시 일하는 건물로 돌아와 다른 환자를 수술한 적도 있다”고 했다.

또 다른 퇴직 성형의도 “‘모든 코 수술은 이비인후과 의사인 ○○○에게 맡기라’는 지시에 따라 섀도 닥터에게 이름을 빌려줬다”고 털어놨다. 이들이 병원과 맺은 근로계약서에는 “성과급은 고객이 담당 의사를 수술 집도 의사로 알고 있는 경우엔 5%, 그렇지 않은 경우엔 2%를 지급한다”는 등 대리 수술이 체계화돼 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확인됐다.

환자들이 마취된 상태에서 의식이 없는 틈을 이용해 환자의 동의 없이 ‘의사 바꿔치기’로 수술하는 ‘유령수술(ghost surgery)’은 의료계에서 암암리에 성행하고 있다. 고용 전문의보다 비전문의에게 지급되는 급여가 적다는 점, 상담 의사와 수술의를 분업화하면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병원 운영진이 섀도 닥터를 기용한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엄연한 범죄행위 같아도 증거 수집이 어려워 대리 수술을 실제 형사처벌까지 한 전례도 없었다. 수사기관 관계자는 “피해자가 의식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증언할 수 없고, 직접 대리 수술을 한 의사가 사기 공범이 될까 봐 양심고백을 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중앙지검 형사7부(부장 정순신)는 ‘유명 스타 성형외과 의사’라는 간판을 내세워 직접 수술하는 것처럼 환자들을 모으고 실제 다른 의사를 투입해 수술하게 한 혐의(사기 등)로 그랜드성형외과 대표 유모 씨(44)를 불구속 기소했다고 4일 밝혔다. 유 씨는 향정신성의약품관리대장을 거짓으로 작성한 혐의, 진료기록부를 보존하지 않은 혐의도 받고 있다. 병원 측은 “의료계에서 통상적으로 시행하는 협진을 오해한 것이다. 향후 재판에 성실하게 임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마땅한 처벌 법령이 없어 난제였던 대리 수술 행위에 검찰이 사기죄를 적용해 형사처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검찰은 수술을 수련의에게 맡기고 특진비를 챙긴 전 경희의료원장을 상습사기죄로 처벌한 2000년 대법원 판례와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대리 수술은 환자의 신체 자기 결정권을 침해한 것”이라며 상해죄로 판단한 1983년 미국 뉴저지 주 대법원의 판례 등을 수개월간 검토해 첫 사기 혐의 적용을 이끌어낸 것으로 알려졌다.


※ 유령수술(대리 수술)

환자에게 동의를 받지 않은 의사가 수술 전체를 하는 형태. 고용된 성형외과 의사들이 환자를 진찰한 뒤 상담하면 환자는 수술비를 지불하고 수술실에 입장한다. 수술대에 누운 환자에게 프로포폴을 주사해 수술 마취를 하면 환자가 수면에 빠졌는지 확인한 후 대리 집도 의사인 ‘유령 의사(섀도 닥터)’가 들어가 수술을 하는 것을 말한다.

신나리 journari@donga.com·조건희 기자
#의료사기#유령수술#스타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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