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디자인만 바꿔도 치매치료 효과

  • 동아일보

침실엔 젊었을 때 사진… 수도꼭지엔 냉-온 표시 스티커… 차분한 단색 벽지…
환경 개선땐 생활 수행능력 향상… 서울시, 인지건강 가이드북 발간

치매 환자의 인지건강 향상을 돕기 위한 디자인. 눈에 쉽게 띄도록 수납장 손잡이를 주변과 대비되는 색으로 바꾸고 수납물의 이름과 그림이 인쇄된 스티커를 붙였다(맨위 사진). 또 현금이나 열쇠, 휴대전화처럼 중요한 물건은 현관 옆 테이블 등 기억하기 쉬운 장소에 모아 두는 것이 좋다. 서울시 제공
치매 환자의 인지건강 향상을 돕기 위한 디자인. 눈에 쉽게 띄도록 수납장 손잡이를 주변과 대비되는 색으로 바꾸고 수납물의 이름과 그림이 인쇄된 스티커를 붙였다(맨위 사진). 또 현금이나 열쇠, 휴대전화처럼 중요한 물건은 현관 옆 테이블 등 기억하기 쉬운 장소에 모아 두는 것이 좋다. 서울시 제공
“저 사진을 도대체 어디서 찾았지…. 그래도 이렇게 걸어 놓으니 옛날 생각도 나고 좋아요.”

서울 양천구의 한 연립주택에 사는 이순임(가명·79·여) 씨 부부의 침실 벽에는 빛바랜 사진 두 장이 나란히 걸려 있다. 각각 40여 년 전 찍은 이 씨와 그의 남편의 독사진이다. 잡동사니에 섞여 오랜 기간 행방을 알 수 없던 사진들을 최근 서울시 디자인정책과 직원인 김원기 씨(37)가 발견했다. 3일 김 씨는 “추억이 담긴 친숙한 물건은 기억력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 씨 부부의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차분한 느낌이 든다. 베이지색 벽지 덕분이다. 원래 붉은색의 꽃무늬 포인트 벽지가 화려하게 있던 곳이다. 눈에 잘 띄지 않던 흰색의 조명 스위치는 멀리서도 한눈에 알 수 있는 검은색 스위치로 바뀌었다. 현관 옆에는 1m 높이의 수납장이 생겼다. 바닥과 식탁 위에 널브러져 있던 밥통과 각종 물건들이 이곳에 차곡차곡 정리됐다.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수납장 첫 번째 칸에는 집 열쇠와 할아버지의 약이 들어 있었다. 원형이었던 방 문고리는 힘을 조금만 줘도 열리는 레버형으로 교체됐다.

복잡하기만 하던 이 씨 부부의 집이 이처럼 차분하게 바뀐 것은 지난해 3월. 4년 전 치매 초기 진단을 받은 이 씨 남편(77)의 ‘인지건강’을 돕기 위해서다. 서울시가 인지건강 연구진의 아이디어에 따라 집 안 곳곳을 변화시켰다.

인지건강 디자인의 핵심은 ‘간소한 일상’. 서울시와 함께 연구를 진행한 정지향 이대목동병원 신경과 교수는 “잡동사니가 많아 물건을 찾지 못하는 등 일상의 어려움이 있으면 환자들이 당황하게 되고 생각 자체를 꺼리게 된다”며 “이런 요인을 줄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집 안 찬장과 서랍장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스티커가 여러 장 붙어 있었다. 스티커마다 ‘수건’ ‘수저’ ‘침구’라는 글씨와 그림이 인쇄돼 있다. 물건을 쉽게 찾을 수 있고 있던 자리를 금방 잊지 않게 하는 효과가 있다.

얼핏 보면 사소한 디자인이지만 이 씨 부부의 삶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대한치매학회 연구진과 정지향 교수, 최경실 이화여대 디자인대학원장이 부부의 삶을 6개월간 관찰한 결과 일상생활 수행 능력이 77.78% 향상됐다. 부부의 동의 아래 24시간 비디오 촬영 관찰을 해보니 행동의 정확성이 크게 높아졌다. 이 씨는 “물건들이 깔끔하게 정리된 것만으로도 무척 편하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이 씨 부부의 사례 등을 토대로 ‘인지건강 주거환경 가이드북’을 국내 최초로 발간했다. 집 안 공간마다 적용할 수 있는 디자인과 체크리스트, 스티커가 부록으로 들어 있다. 각 자치구 치매지원센터에 있고 서울시 홈페이지에서 전자책으로도 볼 수 있다. 시민청 서울책방에서 구매도 가능하다.

전문가들은 인지건강 디자인이 치료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했다. 정 교수는 “약물 치료보다 환자의 일상을 돕는 것이 더 효과적이며, 가벼운 인지장애를 겪는 노인에게 치매 예방 효과도 있다”며 “치매서비스개발센터를 두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영국처럼 노인 친화적인 주거환경을 만들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치매치료#치매#집안#디자인#인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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