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공중화장실 아니다” 성범죄 무죄

  • 동아일보

20대男, 몰카 찍으려 술집 여자화장실에 침입했지만…
이동-간이시설 등 5곳만 처벌 논란

남성이 여성의 신체를 몰래 촬영하기 위해 술집의 여자화장실에 들어갔다면 성범죄가 될까. 최근 법원에서는 몰카 촬영은 유죄이지만 술집 여자 화장실에 간 것은 성범죄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법을 엄격하게 적용한 결과이긴 하지만 법원의 성범죄 판결이 국민의 법 감정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서울북부지법 형사9단독 박재경 판사는 지난해 3월 서울 노원구의 한 술집 여자화장실에서 여성들이 용변을 보는 모습을 촬영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커피숍 매니저 장모 씨(27)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고 지난달 30일 밝혔다. 박 판사는 몰카를 촬영한 혐의(성폭력처벌법상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는 인정하면서도 여자화장실에 들어간 혐의(성적 목적을 위한 공공장소 침입 행위)는 무죄라고 판단했다. 술집 여자화장실은 성폭력처벌법상 ‘공중화장실’이 아니라는 게 그 이유다.

현행 성폭력처벌법에서는 성적 목적을 가지고 공중화장실이나 목욕탕 등에 침입한 행위를 처벌하고 있다. 문제는 법에서 정의하는 공중화장실 개념이 지나치게 좁다는 점이다. 성폭력처벌법은 ‘공중화장실법’의 정의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공중화장실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설치한 화장실, 개방화장실(공공기관의 시설물에 설치된 화장실), 이동화장실, 간이화장실, 유료화장실 등 5곳뿐이다. 남성이 성적인 욕망을 채우려고 여자화장실에 들어갔어도 그 장소가 술집 화장실처럼 특정인에게 제공하기 위해 설치한 곳이라면 성범죄로 처벌할 수 없는 셈이 된다.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원에서는 법에 따라 판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면서도 “상가 화장실은 개인 화장실이 아닌데 공중화장실 개념을 너무 협소하게 봤다. 공중화장실법이나 성폭력처벌법 중 하나를 고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성범죄 법원 판결을 둘러싼 논란은 과거에도 있었다. 지난달 24일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엘리베이터 안까지 따라가 얼굴을 제외한 여성의 상반신을 몰래 촬영한 혐의로 기소된 유모 씨(29)에게 벌금 10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 취지로 사건을 파기 환송했다. 가슴 부위를 강조하거나 윤곽선이 드러나지 않았고 시야에 통상적으로 비치는 부분을 그대로 촬영한 것은 성폭력처벌법상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신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법원은 죄형법정주의에 따른 판결이라는 입장이지만 ‘성범죄 처벌과 피해자 보호’라는 입법 취지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거셌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이런 판결이 가해자들에게 몰카 촬영 시 처벌을 피할 수 있는 요령을 가르치거나 ‘전신은 찍어도 된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정현미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특정 부위를 촬영했을 때만 처벌하는 게 문제”라며 “고의성이 있다면 촬영 부위와 무관하게 처벌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호경 기자 whalefisher@donga.com
#법원#성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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