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de GyengBuk]신라의 창조적 자세 계승한 4대 정신, ‘한국정신의 창’ 되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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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정체성②]경북의 정체성을 찾다

도산서원 앞 천연대 풍경. 퇴계 이황이 산책하며 사색했던 곳이다.
도산서원 앞 천연대 풍경. 퇴계 이황이 산책하며 사색했던 곳이다.

‘경북다움’에 대한 고민 통해 신라정신 등 본받은 4대 정체성 밝혀
화의: 어울림

소통 중시하던 신라의 화백제도나 하회별신굿탈놀이처럼

모두 하나가 되는 조화의 정신

창신: 나아감

삼국통일 이룬 변방의 나라 신라, 개방적인 자세로 지리적 약점 극복

창의적이고 역동적 정신 돋보여어울림(화의)-더불어 살다

어울림의 원형은 고유한 사상인 풍류에서 잘 드러난다. 신라 학자 최치원은 풍류를 유교 불교 도교가 수용되기 이전부터 우리나라의 독창적 사상으로 보고 이를 ‘현묘한 도’라고 표현했다. 화랑은 이 3교의 가르침을 포용한 신라 정신의 상징이었다. 화랑을 풍류도 풍월도 국선도 같은 이름으로 부른 데서도 알 수 있다.

화랑의 어울림 정신은 수련법에서도 나타난다. 산천을 돌면서 지리를 익히고 땅의 기운을 통해 조화로운 원리를 익혔다. 전국 각지를 다닌 화랑은 곳곳의 주민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한편 천지자연과 교류하는 사람의 삶을 경험했다. 화랑의 이 같은 조화와 포용은 신라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 특히 화백제도에서 잘 드러난다. 신라는 건국 초기의 기존 세력이던 6부의 촌장들을 정책 결정에 참여시키고 만장일치로 의사를 결정했다. 이것이 화백제도의 뿌리다. 화백제도는 한 명의 반대가 있어도 의안이 통과되지 않았다. 다수결이 아닌 전원합의로 의결하는 회의 체제이다. 이 같은 소통과 화해를 통해 어울려 화백제도를 운영하였고 화랑제도를 창안해 인재 양성을 추진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발생한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원효 스님은 화쟁(和諍)을 제시했다. 다양한 종교적 갈래와 이론적 대립을 더 높은 차원으로 통합하려는 노력이다. 화쟁 정신은 이후 한국 불교의 중요한 특징으로 계승됐다. 최치원은 불교에 유교와 도교를 융합했다. 신라인들은 이처럼 다양한 학문과 가치를 수용하고 발전시켜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풍성한 신라문화를 이룩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조선 선비의 어울림 정신은 신분의 한계를 넘어 공동체를 생각하는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퇴계와 배순이 보여준 어울림은 감동적이다. 풍기(경북 영주)군수로 부임한 퇴계는 서원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대장장이 아들 배순(1535∼1612)은 신분 때문에 강의에 참여하지 못하고 문 밖 뜰에서 엿들었다. 이런 모습을 본 퇴계를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가르쳤다.

양반과 평민이 어울리는 모습은 안동 하회마을의 하회별신굿탈놀이에서 선명하게 보인다. 탈춤은 당시 피지배층의 문화였다. 하회마을의 양반들은 평민들의 이 탈놀이를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지도록 재정적 지원을 했다. 하회마을이 500년 전통을 이어온 바탕에는 양반과 평민이 어울려 만들어 온 역사와 문화가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1980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고 하회마을은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런 마을에서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이겨내는 데 큰 역할을 한 서애 류성룡이 태어난 것이 우연이 아니다.

서양 열강이 모여들던 19세 중엽에 나라는 큰 어려움에 놓였다. 농민들의 삶은 매우 힘들었다. 이때 경주 출신의 수운 최제우는 동학을 창시해 ‘사람’에 대한 보편적 가치를 주장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동학이 기존의 사상을 융합해 “모든 사람은 하늘처럼 존중돼야 한다”고 한 주장은 어울림 정신의 실천이었다. 경북도는 이 같은 동학을 재조명하는 사업을 펴고 있다. 경북에서 싹을 틔운 새마을운동도 어울림 정신의 산물이다. 잘사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보려는 협동, 즉 어울림이 없었다면 태어나지 못했다.

퇴계 16대 종손 이근필 옹의 ‘경’ 글씨. 퇴계가 공경하는 삶으로 일관했다는 뜻을 담고 있다.
퇴계 16대 종손 이근필 옹의 ‘경’ 글씨. 퇴계가 공경하는 삶으로 일관했다는 뜻을 담고 있다.


나아감(창신)-나라의 울림을 이끌다

나아감은 개인과 공동체의 모습을 끊임없이 성찰하면서 새로움을 창조하려는 노력이다. 지금의 경북에 해당하는 신라는 변방인 동남지역에 위치한 국가였지만 삼국 통일을 이뤄냈다. 통일을 이룬 데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지만 ‘창신’의 정신이 크게 작용했다.

신라는 지리적 불리함을 이겨내기 위해 국호를 ‘새롭다’는 뜻인 ‘신(新)’과 ‘두루 펼친다’는 뜻의 ‘라(羅)’로 지었다. 고립적 위치에서 폐쇄적인 방어로 국가를 지탱하기보다는 외부를 향해 개방적인 자세로 국가의 역동성을 창출하려는 의지가 국호에 담겨 있다.

통일을 이룩한 신라정신이 지금 시대에 다시 조명되는 이유는 신라인의 포용과 개방, 국제적 문화 마인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국제도시 서라벌은 실크로드(고대 통상교역로)의 동쪽 출발지이다. 세계 시민이었던 신라인들은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에 적극적이었다.

당시 활발했던 동서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이 많이 남아있다. 올해 열린 ‘실크로드 경주’는 실크로드를 주제로 처음 열린 행사였다. 실크로드를 활용한 국제 교류는 내년부터 더욱 활발하게 펼쳐진다.

창조적으로 나아간 모습은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 스님의 노력에서도 잘 볼 수 있다. 고려시대 들어 몽고 침략기에 억눌린 민족을 위해 일연 스님은 민족사관을 제시해 구심점을 형성하도록 했다. 단군신화에서 민족의 기원을 찾고 흩어졌던 고대 국가의 민간설화 등을 소재로 삼아 주체적 역사의식을 낳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북도와 군위군이 삼국유사를 목판으로 남기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도 일연 스님의 뜻을 새기고 계승해 나라가 새롭게 나아가도록 하려는 의지에서다.

동학을 제창한 최제우의 정신 또한 창의적 나아감의 사례이다. 신분과 남녀 차별을 없애 평등한 세상을 추구한 열망은 선구적인 민본 사상이다. 위태로운 나라를 지켜내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기존과는 다른 생각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정신을 실천했다. 영덕 출신의 평민의병장 신돌석의 경우도 나아감의 상징이다. 평민의병장에게 양반이나 유생들이 신분을 뒤로하고 모여들었다. 크게 나아가는 자세로 신분 구별 같은 칸막이를 뛰어넘는 자세이다.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한 인물은 대부분 혁신유림이었다. 만주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안정된 생활과 지위를 버리고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힘겨운 독립운동을 하면서 주체적 정신을 잃지 않도록 이상룡은 ‘대동역사’를, 류인식은 ‘대동사’를 지어 민족의식을 높였다. 모두 나라를 새롭게 이룩하기 위한 나아감의 상징이다.

6·25전쟁 때 경북지역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 중요한 전투였다. 이 전투를 이겨낸 힘은 국군뿐 아니라 주민들의 필사적인 지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경북의 문인인 조지훈 박목월 이호우 구상 등은 종군작가로서 군인의 사기를 높이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경북도는 낙동강 방어선을 따라 ‘낙동강 호국평화벨트’를 조성했으며 매년 승전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포항제철소와 구미전자산업단지, 새마을운동도 산업화를 위한 나아감의 정신을 보여준다. 경북에서 꿈틀거린 이 같은 모습은 모두 ‘새롭게 두루 펼쳐 나간다’는 ‘신라’ 정신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정체성이다.

이권효 기자 bor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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