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하라” 안내방송에 세월호 떠올린 승객들 “문 열자”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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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추돌 사고/상황 재구성]
뒤차 “역 진입” 방송하고도 질주… 꽝 하는 순간 불 꺼지고 아수라장
서로 부딪히고 깔린 승객들… 직접 비상문 열고 선로로 뛰어내려


시민 채성진 씨는 2일 오후 3시 30분경 서울 지하철 2호선 상왕십리역 개찰구에 들어서다 열차의 위치가 표시된 전광판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전동차는 앞차와 뒤차가 2, 3개 역 정도 거리를 두고 움직이는데 전광판 화면 속에는 열차 모양 아이콘 2개가 거의 나란히 붙어 있었다. 승강장으로 내린 채 씨는 놀라온 광경을 목격했다. 전동차(2260호)가 돌진하듯 역사로 들어오고 있었다.

“열차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들어왔어요. 여기가 역인데….”

당시 선로에는 이미 다른 전동차(2258호)가 들어와 있었고 이제 막 왕십리역을 향해 출발한 참이었다. 이 열차 맨 뒤칸에 타고 있던 박모 씨(52)는 문 앞에 서서 휴대전화로 윷놀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 목적지인 성수역까지 네 정거장을 남겨둔 상황이었다. 박 씨가 탄 칸의 좌석은 빈자리가 없었고 그 앞에 사람들이 빽빽이 서 있었다. 전동차는 평소보다 역에 오래 머물며 전동차 출입문과 스크린도어를 여러 차례 여닫았다. 일부 승객은 “왜 출발을 안 하느냐”고 항의하듯 소리쳤다.

승강장에 들어서던 전동차(2260호) 맨 앞칸에 탄 대학생 배모 씨(20)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상왕십리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는데 열차가 속력을 줄이지 않는 것이었다. 배 씨가 차창 너머로 바깥 상황을 살피려던 순간 덜컹하는 진동과 함께 몸이 붕 뜨는 느낌을 받았다. ‘쾅!’

배 씨는 앞쪽으로 구르면서 어딘가에 강하게 부딪히는 충격을 받았다. 서 있던 승객들도 대부분 중심을 잃고 앞쪽으로 튕겨 나가며 서로 부딪히고 깔렸다. 잡고 있던 안전 손잡이를 계속 잡고 있던 한 중년 여성은 허리가 확 휘었다. ‘악’ 하는 비명소리가 났다. 열차 칸 앞쪽은 앞으로 휩쓸려온 사람들이 서로 충돌하며 생긴 상처 때문에 바닥 군데군데에 핏자국이 뱄다. 몇 초 뒤 열차 내 전등이 모두 꺼졌다. 열차 앞쪽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한 승객이 “이러다 폭발하는 거 아니야” 하고 불안하게 중얼거렸다.

승강장에 서 있었던 채 씨는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뒤차가 앞차의 꽁무니를 그대로 들이받은 것이다. 뒤차는 3량이 아예 선로에서 벗어나 있었다. 전동차 간 이음매 부분은 구겨지고 부서져 있었다. 뒤차 앞쪽 칸 유리창도 산산이 깨졌다.

앞차 맨 뒤칸에 서 있었던 박 씨는 추돌 충격으로 의자 옆 난간에 얼굴을 정면으로 부딪혔다. 순간 얼굴이 화끈하며 정신을 잃었다. 앞차도 충돌 직후 전기가 나가 객실이 어두워졌다. 일부 승객이 휴대전화 손전등 기능을 작동시켜 안을 밝히자 몇 명이 비상구 옆에 있는 수동 개폐 장치를 통해 문을 열었다.

박 씨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20대로 보이는 남성 3명이 자신을 부축해 열차 밖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박 씨의 점퍼 가슴팍은 코에서 흘러내린 피로 붉게 얼룩져 있었다. 박 씨는 정신이 혼미한 채로 지하철 계단 쪽에 걸터앉았다. 승객들은 다리를 절뚝이며 어두운 선로를 통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역무원이나 제복을 입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선로 주변에선 “엄마!” “○○야!” 하며 서로를 다급히 찾는 외침이 간간이 들렸다.

사고 후 얼마나 지났을까. 뒤차에서는 “밖으로 나오지 말고 대기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어둠 속에서 “대기하자”는 의견과 “무조건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엇갈렸다. 한 남성이 “세월호 때도 시킨 대로 가만히 있다가 다 죽었어”라고 소리치자 ‘빨리 문을 열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한 승객이 전동차 문을 열었고 승객들은 밖으로 빠져나가 선로를 따라 상왕십리역 승강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젊은 여성들은 두려움에 질린 듯 흐느꼈다. 승객들은 곧 “침착하자”며 서로를 다독였다. 남자 승객 서너 명은 차 비상문을 열려고 손가락을 문틈에 넣고 끙끙댔다. 한 승객이 벽 쪽을 더듬더니 비상레버를 찾아 당겼다. 문이 열렸다. 군복을 입은 청년들이 머리가 희끗한 노인을 부축했다.

승강장에서 사고를 처음부터 목격한 채 씨는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된 이 상황이 기가 막혔다. 열차 안에서 힘들게 몸을 이끌고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머리가 새하얀 지팡이 든 할머니, 만삭의 임신부, 교복 입은 학생들도 있었다. 잠시 후 뒤차 맨 앞쪽 문이 열렸다. 기관사가 어깨와 팔 부위에 피를 흘리며 문을 열고 나왔다.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기관사실 바닥에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부상자들은 밖에 대기하던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향했다. 승강장에는 “기관 고장으로 열차 운행이 불가능하니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라”는 멘트가 나왔다. 다행히 다친 곳이 없는 승객들은 지상으로 올라가자마자 황급히 사고 현장을 빠져나갔다. 세월호 침몰 사고가 벌어진 지 17일째인 2일 전동차 승객 1000여 명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신광영 neo@donga.com·강은지·박희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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