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폭언, 자녀의 폭력성으로 돌아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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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세상을 바꿉니다/동아일보-채널A 공동 연중기획]
<3>가정에서… 학교에서… 나쁜말에 포위된 아이들

《 “넌 대체 누굴 닮아서 이 모양이니?” 이제껏 들어본 적 없던 부모의 호통에 아이는 흠칫 놀라 움츠러들었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을까. 엄마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나는 왜 태어난 걸까….’ 이러한 혼란이 반복되면 그 아이는 어떤 어른으로 자라나게 될까. 성장기 아동과 청소년은 가정과 학교를 오가며 숱한 말에 둘러싸인다. 아이들이 인격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폭언이나 윽박지르는 듯한 말투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무의식중에 폭력성이 자리 잡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설교나 훈육이 불가피한 상황도 있지만 감정에 휩쓸려 격앙된 표현을 쓸 경우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기는커녕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경우도 많다. 직접적인 힐난뿐 아니라 아이가 지켜보는 데서 벌어지는 부부싸움도 악영향을 미친다. 아동·청소년 교육학과 교수들과 청소년 전문 상담사, 소아정신과 전문의 등 각계 전문가의 조언을 통해 다양한 상황에서 아이들과의 올바른 소통 방법을 정리했다. 》

[사례 1] 부모의 잦은 다툼, 우울증 환자 만든다

아버지: “이럴 거면 갈라서든가. 내가 어쩌다 이런 사람을 만나서….”

어머니: “그러는 당신은 해준 게 뭔데? 월급은 쥐꼬리만 한 주제에….”


부모의 말다툼을 지켜본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죄책감을 갖는 경향이 있다. 나이가 어릴수록 자기중심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황경익 경기도 청소년상담복지센터 상담가는 “아이들은 마치 자신 때문에 사이가 나빠져 부모가 이혼할 위기에 처했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 이런 생각이 원죄처럼 아이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이런 경험을 한 아이가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부모가 충고를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홍순범 서울대병원 소아정신과 교수는 “부부싸움을 자주 접한 자녀들은 부모의 훈계를 들어도 ‘자기들의 삶도 행복하게 꾸려가지 못하면서 성가시게 한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인간은 지금이 몇 시인데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야?”처럼 아이가 듣는 자리에서 배우자의 흉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녀는 부모의 거친 말투와 비난에서 고스란히 공포를 전달받고, 동시에 ‘잘못을 하면 거친 말을 해도 된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부모의 잦은 다툼은 우울증이나 정서불안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석정호 서울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팀이 항우울제를 복용하는 환자 26명과 정상인을 비교한 결과 우울증 환자들은 공통적으로 성장과정에서 부모의 싸움, 정서적 학대, 방임 등 ‘생애 초기 스트레스’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례 2] 극단적인 꾸짖음, 애정의 단절 가져온다

어머니: “꼴도 보기 싫으니까 집에서 나가.”

아들: “엄마, 잘못했어요.”

어머니: “이제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이 가상대화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은 아이의 잘못을 ‘단절’과 ‘외면’으로 바로잡으려 했다는 것이다. 박혜원 울산대 아동가족복지학부 교수는 “아이에게 ‘엄마라고 부르지 말라’고 꾸짖는 것은 훈육 이론에서 ‘애정의 철회’라 불리는 것으로 신체적 처벌만큼이나 부정적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압적인 꾸짖음도 역효과를 부른다. 가령 방 안을 정리하지 않는 아이에게 “집안 꼴이 이게 뭐냐. 내가 청소하는 사람이냐”고 꾸짖는 것은 관리자의 태도에 해당한다. 최윤진 중앙대 청소년학과 교수는 “아이의 자율권을 인정해 주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접근해야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예컨대 ‘다른 집에 가봤더니 정리가 안돼 불편하더라’는 식의 표현으로 자발적인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사례 3] 교사의 감정적 질타, 적개심만 키운다

A 교사: “또 싸움질이냐? 대체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야?”

B 교사: “네가 친구를 때렸다는 사실을 알면 부모님께서도 가슴이 아프실 거야.”


두 교사의 훈계는 같은 잘못을 지적하고 있지만 학생이 받아들이는 메시지는 다르다. A 교사의 말은 학생이 싸움을 벌였다는 행동 자체보다 가정교육을 잘못 받았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럴 때 학생은 ‘부모 얘기는 왜 꺼내느냐’는 반항심을 갖게 된다.

학생의 태도가 불성실한 경우, 질타보다는 수업에 집중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줘야 한다. 일례로 수업 도중 졸고 있는 학생에게 “넌 학교에 자러 오냐”는 꾸중보다는 “세수 한 번 하고 오라”는 말이 더 효과적이다. 조한익 한양대 교육학과 교수는 “공개적으로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투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강조했다.

“넌 왜 ○○보다 못하냐”는 등 학습능력을 다른 급우와 비교하는 표현도 삼가야 한다. 이학래 창원교육지원청 학생학부모지원과장은 “아이들은 잠재능력을 의심받을 때 자율적 학습의지가 꺾이고 적개심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이진석 gene@donga.com·곽도영 기자
▼ “아이들 ‘욕배틀’ 영상보고 깔깔 웃어대” ▼

‘B끕 언어’ 펴낸 권희린 장충고 교사 “욕설에 무감각… 의미도 잘 몰라”


우정렬 기자
우정렬 기자
“‘욕배틀’ 영상이라고 들어보셨어요? 청소년들이 컴퓨터로 채팅을 하며 서로에게 심한 욕설을 경쟁하듯 퍼붓는 걸 찍은 동영상인데요. 저는 이 영상을 본 제자들이 ‘재미있다’며 깔깔대는 게 훨씬 충격적이었죠. 아이들이 나쁜 말, 아픈 말에 얼마나 무감각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서울 장충고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권희린 교사(31·사진). 올해 5년 차 교사인 그는 지난해 제자들이 쓰는 비속어, 은어 등의 의미와 용례를 분석한 ‘B끕 언어: 비속어 세상에 딴지걸다’(네시간)라는 책을 냈다. 평소 제자들이 욕과 비속어를 남발하는 게 안타까워 수업 시간마다 5∼10분씩 이런 말들의 어원과 의미를 제자들에게 설명해 준 내용을 엮은 책이었다.

“‘쥐뿔도 모르는’의 ‘쥐뿔’도 실은 쥐의 생식기를 뜻한다고 알려주고, 감탄사처럼 쓰는 ‘염병할’도 전염병인 장티푸스를 뜻하는 ‘염병을 앓을’에서 유래한 거라고 알려줬더니 애들이 충격을 받는 모습이더군요. 의미를 모른 채 써온 아픈 말이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겠죠.”

자신들이 쓰는 말의 어원과 참뜻을 알게 되면서 제자들의 언어습관도 변하기 시작했다. 다른 교사가 수업시간에 무심코 뱉은 비속어를 학생들이 먼저 지적하고 나서는가 하면, 성(性)적인 의미가 강한 욕설과 비속어는 자제하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권 교사는 나쁜 말, 아픈 말이 일상화된 데에는 부모와 교사의 책임이 작지 않다고 말했다. “당장 저도 제자들이 여선생이라고 만만히 보고 까불까 봐 ‘개기지 마’ ‘입 닥쳐’ 같은 말을 자주 썼거든요. 부모님들도 머리 큰 자녀를 통제하기 힘들어 강한 말, 센 말로 억누르기 쉬운데, 아이들은 이런 말을 금세 흡수해 ‘나도 저래도 되나 보다’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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