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던 한국인, 강도 돌변… 돈뺏고 ‘탕탕’… “구덩이에 묻어라”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23일 03시 00분


코멘트

■ 필리핀서 교포에 죽을 뻔한 한인사업가 ‘필사의 탈출기’

두 발의 총성이 들린 건 환대를 받으며 거실 소파에 앉을 때였다. 황급히 현관 쪽을 바라보니 뒤따라 들어오던 필리핀인 운전사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방금 전까지 “와주셔서 감사하다”라며 미소를 띠던 남자는 45구경 권총을 들고 있었다. 그가 소파로 다가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조○○가 누구야?” 벌벌 떨고 있던 조모 씨(당시 54세)가 고개를 들자 또다시 총소리가 두 번 울렸다. 소파엔 김모 씨(48)만 홀로 남겨졌다. 눈을 질끈 감은 김 씨는 이마에 총구가 닿는 것을 느꼈다. 2007년 3월 5일 오후 1시 필리핀 마닐라 인근 앙헬레스 시의 한 외진 주택에서 벌어진 일이다.

필리핀에서 의류 사업을 하는 김 씨는 전날 밤 친척인 조 씨의 전화를 받았다. “중고차를 싸게 판다는데 차를 함께 받으러 가자”라는 것이었다. 조 씨에게 중고차 매매를 제안한 사람은 조 씨의 지인 유모 씨(48)였다. 조 씨가 마닐라에서 청소년 오락기 공급업체를 운영하며 소송에 휘말렸을 때 통역을 해준 인연으로 알게 됐다. 유 씨는 필리핀에서 10년 넘게 살아 현지어에도 능숙했다. 이튿날 조 씨를 따라 나선 그 길이 지옥행이라는 걸 김 씨는 알지 못했다.

이마에 닿은 총구는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김 씨는 훗날 “그때 화약 냄새를 맡으며 이렇게 죽을 순 없다고 생각했다”라고 했다. 김 씨는 눈앞의 총을 밀치고 현관으로 뛰기 시작했다. 현관에 닿을 즈음 어깨에 묵직한 충격을 받고 넘어졌다. 누군가 둔기로 내리친 것이었다. 유 씨였다. 그는 ‘밖에서 차만 보고 가겠다’던 조 씨와 김 씨를 “집에 마누라와 애들이 있으니 차 한잔 하고 가라”라며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유 씨 일당 3명은 김 씨를 제압한 뒤 안방으로 끌고 가 팔다리를 결박한 채 엎드려 뉘었다. 그러곤 “1000만 원을 주면 풀어주겠다”라고 위협했다. 숨진 조 씨의 주머니를 뒤져 중고차 살 돈으로 가져온 500만 원은 이미 챙긴 뒤였다. 김 씨는 엎드린 채 얼굴만 옆으로 돌려 한국에 있는 친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1000만 원이 송금된 사실을 확인한 유 씨는 김 씨에게 “그래도 좀더 오래 살았잖아”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곧 방문이 다시 열리더니 다른 남자가 들어와 김 씨의 등에 두 방의 총을 쐈다. 김 씨는 정신을 잃었다.

“뒷마당에 파묻으면 아무도 몰라. 다 파놨으니 빨리 옮겨.” 희미하게 의식을 찾은 김 씨의 귀에 말소리가 들려왔다. 등에 총 두 발을 맞았지만 다행히 주요 장기는 피해갔다.
몸을 움직여 보자 뒤로 묶인 팔은 여전히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발 쪽은 매듭이 무릎 쪽으로 살짝 올라와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다. 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옷 주머니를 뒤지는 거친 손길이 느껴졌다. 신분증이나 현금을 챙기려는 듯했다. 김 씨는 눈을 감은 채 숨을 멈추고 죽은 듯이 있었다.

유 씨 일당은 김 씨를 옮겨 뒷마당에 파놓은 구덩이로 내던졌다. 내팽개쳐지면서 자갈에 얼굴을 정면으로 찧었다. 순간 신음소리가 나올 뻔했지만 가까스로 삼켰다. 그들이 나머지 시신을 가지러 간 사이 김 씨는 있는 힘을 다해 로프에 묶인 두 발을 움직였다. 빠질 듯하면서 끝내 빠지지 않았다. 곧 유 씨 일당의 발걸음 소리가 났다. 다시 죽은 듯 누워 있는 김 씨의 등 위로 조 씨의 시신이 겹쳐졌다.

운전사의 시신이 도착할 때까지가 김 씨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이었다. 발목이 피투성이가 되고서야 비로소 발 한쪽이 로프에서 빠졌다. 오른발은 땅에 질질 끌렸지만 왼발은 땅에 닿을 새 없이 숨 가쁘게 내달렸다. 김 씨가 대문을 여는 순간 운전사 시신을 들고 현관문을 나서는 유 씨 일행과 눈이 마주쳤다.


김 씨는 죽을힘을 다해 집 밖으로 달렸다. 외진 곳이라 길가엔 사람이 없었다. 유 씨 일행은 총을 들고 김 씨 뒤를 쫓았다. 김 씨가 200m쯤 도망갔을 때 비로소 주택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우리말로 “살려주세요”라고 소리 지르며 무작정 문이 열린 집으로 들어갔다. 피투성이가 된 외국인을 보고 몰려드는 현지 주민들을 유 씨 일당은 멀찍이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김 씨가 현지 경찰에 신고하면서 유 씨 일당의 범행이 드러났다. 김 씨에게 총을 쏜 남자는 현지 여행가이드인 이모 씨(44)였다. 이 씨는 2010년 검거된 뒤 국내로 송환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공범 안모 씨는 2007년 국내에서 검거돼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다. 1990년대 중반 필리핀에 건너간 주범 유 씨는 지난해 7월 현지에서 한국 경찰관에게 붙잡혀 22일 국내로 송환됐다.

[채널A 영상] 경찰력 약한 필리핀은 범죄자 ‘도피 천국’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필리핀#살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