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60대 男, 정부중앙청사 침입 방화-투신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0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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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화물질 든 배낭 메고 3중검색 무사통과

14일 오후 1시 반경 위조한 출입증으로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 들어간 김모 씨가 아무런 제지 없이 18층 복도를 걷는 모습(왼쪽 사진)이 폐쇄회로(CC)TV에 촬영됐다. 김 씨가 불을 지른 1808호 교육정보기획과 사무실에 불에 탄 모니터와 의자, 서류
등이 어질러져 있다(오른쪽 사진). 서울지방경찰청 제공
14일 오후 1시 반경 위조한 출입증으로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 들어간 김모 씨가 아무런 제지 없이 18층 복도를 걷는 모습(왼쪽 사진)이 폐쇄회로(CC)TV에 촬영됐다. 김 씨가 불을 지른 1808호 교육정보기획과 사무실에 불에 탄 모니터와 의자, 서류 등이 어질러져 있다(오른쪽 사진). 서울지방경찰청 제공
14일 정부중앙청사에 침입한 김모 씨(61)는 가짜 출입증만을 이용했다. 김 씨가 무단으로 들어온 정부중앙청사에는 후문과 현관, 로비에 총 세 곳의 신분확인 절차가 마련돼 있었지만 아무도 김 씨의 출입증이 가짜라는 것을 확인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 씨가 가진 출입증은 얼핏 보기에 정상적인 출입증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소속 기관조차 적혀 있지 않아 근무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허술한 것이었다. 국가 보안이 허술하지 않도록 재점검하겠다는 최근 정부 발표를 무색케 하는 사건이었다.

○ 가볍게 뚫린 정부의 ‘심장’

이날 오후 1시 15분경 줄무늬 파란 셔츠와 정장바지, 검은색 잠바를 입은 김 씨는 검은색 배낭을 메고 정부중앙청사로 들어왔다. 목에 건 가짜 출입증은 보이지 않게 셔츠 앞주머니에 넣은 채였다.

경찰 2명이 지키고 있는 후문에서 김 씨는 앞주머니에서 가짜 출입증을 꺼내 들어 보이며 통과했다. 후문에서는 2시간마다 의경 2명이 교대로 근무하고 있다. 김 씨가 투신한 뒤 후문을 지키고 있던 의경은 “공무원증 소지 여부를 확인한 뒤 출입시키고 있다”고 말했지만 사진과 얼굴, 소속 부처까지 확인하지는 않은 것이다.

후문으로 어렵지 않게 들어온 김 씨는 현관에 설치된 보안검색대도 그냥 지나쳤다. 평일 근무시간에는 경비대원 한 명이 투시기를 이용해 위험물질 반입을 봉쇄하지만 휴일에는 근무자가 없어 무용지물이었다. 이날 김 씨가 출입할 때에도 검색대는 전원이 꺼져 있었다. 김 씨가 메고 있던 검은색 배낭에는 인화성 물질 500mL가 생수통에 담겨 있었지만 정부부처 출입구를 손쉽게 통과한 것이다.

이어 17분경 마지막 출입확인 절차인 로비의 보안게이트(출입증을 대야 열리는 구조)도 김 씨는 어려움 없이 통과했다. 정상적인 절차였다면 지하철 출입구처럼 카드를 찍은 뒤 출입증에 내장된 IC카드로 신원을 확인한 뒤에야 출입이 가능하지만 이날 3개의 출입구와 1개의 화물용 출입구가 설치된 로비 보안게이트 중 한 곳은 열려 있는 채였다. 당시 로비게이트 주변에는 방호근무자가 근무하고 있었지만 김 씨는 이 역시 가짜 출입증을 보여주며 열려 있는 게이트를 이용해 자연스럽게 통과했다. 정부중앙청사 방호 관계자는 “휴일이었기 때문에 보안게이트 관리자가 직원 출입이 원활하도록 한 곳을 열어 놓았다”고 말했다. 김 씨는 정부중앙청사나 산하단체 등 어느 곳에서도 근무한 적이 없었다. 경찰은 “김 씨가 공무원 출입증 모양을 볼 수 있는 웹사이트에 접속한 사실을 확인했다”며 “가짜 출입증 제작 경로를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 우울증 전력자의 미스터리한 자살

1시 27분경 18층으로 올라간 김 씨는 문이 열린 교육과학기술부 1808호 사무실에 들어간 후 왼편 중앙 책상 위에 놓인 서류뭉치를 모아 생수통에 들어 있던 인화성 물질을 뿌려 불을 붙였다. 당시 사무실 근무 여직원 2명은 모두 김 씨를 등지고 있어 그를 보지 못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여직원들이 뒤돌아보니 이미 2m 높이의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김 씨는 여직원들에게 “대피하세요”라고 두 번 소리쳤다. 놀란 이들이 도망치며 “불이야”라고 소리쳤고 맞은편 사무실에 근무하던 남자 직원 1명이 소화기를 들고 6분 만에 불을 껐다. 김 씨는 이 사이 창문으로 다가가 뛰어내리려 했다. 불을 끄던 직원이 말리려고 다가가자 “나가! 나가!”라고 소리쳤다. 김 씨는 “물을 가져다 달라”고 말했고 직원들이 물을 찾는 사이 유리창문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8월 19일 자신의 인터넷 블로그에 “시조새 관련 진화론을 삭제하려는 것은 교과부의 음모”라며 적개심을 드러내는 글을 올렸다. 또 “정부종합청사 후문에서 1인 시위를 하자”고도 했다.

김 씨의 소지품에서 우울증 치료제로 쓰이는 수면제와 신경안정제가 발견됐다. 경찰에 따르면 김 씨는 외환위기 직후에 한 은행에서 근무하다 외환위기 여파로 1999년 구조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일정한 직업 없이 주식투자를 하거나 아파트 경비원으로 근무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최근까지 우울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고 이 때문에 아내와 별거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 씨의 아내는 “남편이 우울증에 걸린 뒤 스스로 공무원 출신이라는 과대망상에 빠져 있었다”고 말했다. 김 씨는 3일 이혼 문제로 아내와 다투다 폭행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채널A 영상] 불 지른 다음에…“뭘 미적거리냐” 소리질러

[채널A 영상] 엉터리 신분증으로 침입…정부청사도 뚫렸다

서동일 기자 dong@donga.com  
박승헌 기자 hpark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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