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간 강제 성관계, 강간죄 성립’

  • 동아일보

항소심 잇달아 유죄선고… 40년된 대법판례 바뀌나

부부간의 강제적 성관계에 강간죄를 인정하는 항소심 판결이 잇따르고 있어 대법원 판결로 확정될지 주목되고 있다. 대법원이 부부간에는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은 40여 년 전인 1970년. 하지만 검찰 기소는 물론이고 1심 재판에서 부부간의 강간죄를 인정하는 판결이 나온 뒤 최근에는 2심에서도 유죄를 선고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

서울고법 형사9부(부장판사 최상열)는 25일 술을 마신 뒤 과도로 아내 이모 씨(40)를 위협한 뒤 강간한 혐의로 기소된 정모 씨(40)에게 징역 2년 6개월과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고 25일 밝혔다. 재판부는 “형법에서 강간죄 대상을 ‘부녀’로 규정하고 있을 뿐 다른 제한을 두고 있지 않으므로 법률상 부인이 강간죄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볼 수 없다”며 “부부라도 폭행과 협박으로 강제로 성관계를 할 권리까지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정 씨는 4월 경제 문제로 갈등을 겪던 아내 이 씨가 아이들에게 밥을 차려주지 않고 잠을 자는 것에 격분해 술을 마시고 칼로 찔러 전치 2주의 상해를 입히고 강간한 혐의로 기소됐다. 정 씨가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지난해 12월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판사 김인욱)도 아내를 폭행하고 강간한 혐의로 기소된 양모 씨(21)에게 징역 3년과 집행유예 4년의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이는 항소심 재판부에서 부부간 강제적 성관계에 강간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한 첫 판결이었다.

당시 재판부도 “부부 사이에 한쪽의 성적 요구에 응할 의무가 있다고 하더라도 폭행을 당하면서 강압적으로 성관계를 요구받은 경우는 의무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라며 “국가 형벌권을 발동해 배우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할 필요가 있는 것은 명백하다”고 판단했다. 양 씨는 항소심 판결을 받아들였고 대법원에 상고하지 않아 그대로 확정됐다.

하지만 부부간에는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기존 대법원 판결은 여전히 판단의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만약 정 씨가 대법원에 상고할 경우 ‘아내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부당하게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견해와 ‘제3자가 판단하기 힘든 부부 생활의 내밀한 영역까지 국가가 개입하고 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라는 반론을 두고 상당한 논쟁이 일 것으로 보인다.

2009년 부산지법이 부부간 강간죄를 처음으로 인정하는 1심 판결을 내릴 때도 “국가가 개입해 부부관계를 파탄 내는 것이 아니라, 강간으로 혼인 관계가 파탄 났기 때문에 이 죄를 적용한 것”이라며 선을 그은 바 있다.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선진국은 부부간의 강간이나 강제추행을 대부분 인정하고 있다.

장관석 기자 jk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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