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렌즈 낀 타짜들에 ‘텐프로’ 20여 명 100억대 뜯겼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8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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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거 없나. 먹었네, 먹었어.”

서울 강남지역의 한 오피스텔. ‘훌라’ 도박판에 낀 자칭 김치공장 사장 한모 씨(48)는 쉴 새 없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또 오른손을 가만히 두지 않고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카드 우측 위쪽을 잡았다가 주먹을 쥐고 카드 가까이 내려놓는 등 손 모양과 위치를 쉴 새 없이 바꿨다. 한 씨의 말과 손동작에는 각각 지칭하는 카드가 있었다. ‘좋은 거 없나’는 카드 ‘5’, ‘먹었네, 먹었어’는 카드 ‘9’. 카드 우측 위를 잡으면 카드 ‘J’, 주먹을 쥐고 카드 가까이 내려놓으면 카드 ‘4’였다. 속칭 ‘말캉’과 ‘손캉’ 수법이었다.

한 씨의 실제 직업은 사기도박단에 소속된 ‘선수’. 사기도박단은 직접 판에 끼는 ‘선수’와 선수를 지정하고 돈을 배분하는 ‘설계사’, 피해자에게 돈을 빌려주는 ‘꽁지’ 등으로 구성된다. 선수 3명이 서로 패를 알려주며 유리하게 판을 이끌어 가는 사이 자기 카드 읽기에 바쁜 피해자인 유흥업소 여종업원 2명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선수들은 말캉과 손캉을 써도 목표 액수만큼 따지 못하면 형광물질이 묻은 ‘첵카드’를 이용했다. 선수 중 한 명이 “일진이 좋지 않다. 카드를 바꾸자”며 밖으로 나가 특수렌즈를 눈에 착용하고 첵카드를 가져왔다. 특수렌즈로 첵카드를 보면 상대방 패도 읽을 수 있다. 경찰 관계자는 “일당은 도박이 끝난 뒤 양로원, 기원에 기증하겠다며 카드를 모조리 수거해 갔다”고 말했다. 이들은 승률을 조작해 10차례 가운데 두세 차례는 피해자가 돈을 따게 만들어 도박에 대한 미련을 끊지 못하게 했다. 30대 유흥업소 여종업원은 하루에 6000만 원을 잃는 등 2년간 무려 2억 원을 잃고 1억 원의 빚을 지자 결국 지난해 12월 자살했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12일 서울 강남의 고급 룸살롱을 지칭하는 속칭 ‘텐프로’ 유흥업소 여종업원 등 22명을 상대로 사기도박을 벌여 100여억 원을 딴 혐의(특정경제범죄처벌법상 사기 등)로 설계사 이모 씨(57) 등 4명을 구속하고 한 씨 등 3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이 씨 등은 2006년 3월부터 올해 4월까지 서울 강남권에서 ‘훌라’ ‘바둑이’ 사기도박을 벌인 혐의다. 경찰 관계자는 “이들이 현금이 많고 씀씀이가 큰 여종업원을 범행 대상으로 골랐다”며 “피해자들은 사기도박 수법을 몰라 일당이 같은 은어와 손동작을 몇 년 동안 썼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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