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영장기밀 빼낸 판사출신 변호사 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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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4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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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직원 통해 기록 유출… 공무원 비리사건 수사 방해
검찰 “불법 관행 끊기” 강수

전남 순천지역 법조계에서는 올해 들어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무슨 까닭인지 법원이 검찰에서 청구한 구속영장을 잘 발부해 준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광주지법 순천지원의 구속영장 기각률은 올해 1월과 2월 각각 15.6%(77건 중 65건 발부, 12건 기각)와 8.1%(62건 중 57건 발부, 5건 기각)를 기록했다. 이는 같은 기간 전국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률 평균치인 25.1%, 24.2%와 비교할 때 크게 낮은 수치다.

지난해 12월까지만 해도 순천지원의 구속영장 기각률은 22.1%(95건 중 74건 발부, 21건 기각)로 전국 평균 27.2%와 큰 차이가 없었다. 그사이 이 지역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검찰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변호사 A 씨는 자신이 수년 전 판사로 근무할 때 부하로 데리고 있던 법원 직원 B 씨(8급)에게 사건 의뢰인의 구속영장 청구서에 첨부된 검찰 수사기록을 복사해 달라고 부탁했다. B 씨는 옛 상사였던 A 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고 영장에 첨부돼 있던 기록의 일부를 복사해서 넘겨줬다. A 씨가 건네받은 기록에는 ‘지방교육자치단체 고위공무원 C 씨가 지역기업 P사 대표 D 씨로부터 선거자금으로 수억 원을 받았다’는 범죄첩보 보고서 등 민감한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수사기밀이 변호사에게 새나가면서 고위공무원 C 씨를 타깃으로 삼았던 광주지검 순천지청의 수사계획은 완전히 어그러졌다.
▼ 기밀 빼낸 변호사 ‘청산가리 막걸리’ 무죄 받아내 ▼

횡령 혐의 등으로 먼저 구속된 P사 임원 E 씨가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며 입을 다물어 버린 것. 검찰 수사는 더 진전되지 못한 채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자 검찰은 지난해 12월 수사기밀이 새어나간 경위를 조사했고 법원 직원 B 씨가 변호인의 열람이 금지된 수사기록을 유출한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은 올해 들어 A 씨를 직접 소환 조사했고 사건 수임료 소득을 누락했다는 의혹까지 파헤쳤다.

결국 검찰은 6일 A 씨에 대해 공무상기밀누설 교사 혐의로 사전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A 씨에게는 차명계좌를 이용해 수임료 소득을 줄여 신고하는 방법으로 세금을 내지 않은 혐의(조세범처벌법 위반)도 적용됐다. 이 사건이 불거진 뒤 다른 지역 법원으로 전출된 법원 직원 B 씨에 대한 형사처벌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검찰은 밝혔다.

A 씨는 지난해 2월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의 무죄 판결을 이끌어 내는 등 지역 내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검찰은 백모 씨 부녀가 자신들의 부적절한 관계가 들통 나면서 갈등을 빚어온 백 씨의 부인 최모 씨를 살해하기 위해 막걸리에 청산가리를 타 최 씨 등 2명을 숨지게 했다며 이들을 구속 기소했다. 하지만 순천지원은 1심에서 “백 씨 부녀의 자백이 신빙성이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지난해 순천지원은 이 사건뿐만 아니라 아동 성추행 사건 등 주요 사건에서 잇달아 무죄를 선고해 검찰에서는 불만이 팽배했다.

검찰 조사과정에서 A 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외국에 나가 2년 정도 공부를 하고 온 뒤 순천이 아닌 서울 등 외지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겠다”며 선처해 달라는 취지의 얘기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검찰은 법원을 통해 수사기밀이 유출되는 일이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구속영장을 청구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법원 직원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사건 기록 등을 빼내는 사례가 종종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그 같은 관행을 바로잡겠다는 것.

지역 법조계에서는 이 사건이 불거지자 법원 관계자가 검찰 쪽과 접촉해 해당 직원을 문책 조치할 테니 원만하게 해결하자는 뜻을 전달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올 들어 순천지원의 구속영장 기각률이 급격하게 낮아진 것도 검찰을 향한 절박한 구애(求愛)의 뜻이 담겨 있었다는 분석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

전성철 기자 dawn@donga.com  
순천=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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