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공존을 향해/5부]<1>우리 안의 甲과 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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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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功은 甲에게 56% “난 힘없는 乙… 도리 없어”
탓은 乙에게 “乙 스트레스 안 받는다” 고작 6%

일러스트 서장원기자 yankeey@donga.com
일러스트 서장원기자 yankeey@donga.com
《 꼬리에 꼬리를 무는 먹이사슬과 비정한 정글의 법칙. TV 속 ‘동물의 왕국’ 얘기가 아니다. 2011년 한국 사회의 활력과 신뢰를 좀먹는 고질병 ‘갑을(甲乙) 관계’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원래 계약서 등에서 이해당사자를 줄여 부르려고 사용하던 용어인 갑과 을은 이제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권력관계를 지칭하는 말이 되고 말았다. 갑을 관계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은 어떨까. 특별취재팀은 취업포털 잡코리아와 함께 지난달 21∼24일 직장인 393명을 상대로 ‘갑을 관계 인식’에 대한 e메일 설문조사를 벌였다. 편의상 설문 문항에서 갑은 ‘업무에서 주도권을 쥔 쪽’, 을은 ‘주도권이 거의 없는 쪽’으로 정의했다. 》

○ 직장인 22% “나는 갑인 동시에 을”

‘갑과 을 중에 본인의 위치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56.3%(221명)는 ‘을’이라고 답했다. ‘갑’이라는 응답은 21.6%(85명)에 불과했고, ‘한편으로는 갑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을’이라는 응답도 22.1%(87명)나 됐다. 을이라서 받는 스트레스도 심각했다. ‘나는 을’이라고 답한 응답자의 15.8%(35명)는 ‘을이라서 아주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말했다.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라는 답변도 45.3%(100명)나 됐다. 반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편이다’는 6.3%에 불과했다.

병원에 식자재를 납품하는 식품업체의 A 과장은 ‘을’의 울분을 생생히 보여준다. A 과장은 납품 결정권을 가진 ‘갑’인 병원 관계자가 걸핏하면 식재료 대금을 못 주겠다며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아침을 맞는 것이 괴로울 정도라고 했다. 그는 “병원 구내식당에서 조리 및 보관하는 과정에서 변질된 재료도 납품업체 탓을 하는데, 정작 그 재료는 당일 아침에 병원 관계자가 직접 검수하고 ‘OK’한 재료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재계약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우려해 항의는 꿈도 못 꾼다. 갑으로부터 20만∼30만 원에 달하는 팀 회식비 지원을 요구받기도 한다. A 과장은 “갑의 생떼로 마음고생을 하느니 몇 푼 쥐여주고 말자는 심정으로 회식비를 찬조한다”고 털어놨다.

○ “정부 보고서 대필? 공무원과 일할 때 이 정도는 애교”

응답자가 꼽은 우리 사회 최고의 갑, 즉 ‘슈퍼 갑’은 누구일까.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이 43.8%로 ‘슈퍼 갑’ 1위에 올랐다. 공무원(28.5%), 일반 직장인(9.9%), 교수(6.1%) 등이 뒤를 이었다. 조사를 진행한 잡코리아 관계자는 “조사 대상이 직장인들이라 자신들에 비해 견제와 감시가 상대적으로 덜한 직종을 슈퍼 갑으로 보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정부 부처에서 대국민 캠페인 프로젝트를 수주받은 한 광고대행사의 B 부장은 공무원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얼마 전 프로젝트 중간 진행 상황을 담은 보고서를 담당 사무관에게 파워포인트 파일로 보내겠다고 하자, 이 사무관은 아예 자기 부처의 보고서 형식이 담긴 한글 문서 파일을 건넸다. B 부장의 보고서를 형식만 바꿔 베끼는 것도 귀찮아서 아예 B 부장에게 보고서 대필을 요구한 것. B 부장은 “공무원과 일하다 보면 이 정도는 애교”라며 “팀장이나 국장급 공무원은 우리가 외주를 줘야 하는 인쇄소나 홍보대행사를 특정 업체로 선정할 것을 은연중에 강요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 “내 속엔 갑을이 너무도 많아”

생생한 권력 관계인 갑을 관계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을도 필사적이 된다. ‘갑의 갑’을 내 편으로 만들어 갑의 뒤통수를 치는 일도 다반사다. 외부 기관의 실사 업무를 하는 정부 산하기관 C 팀장은 지난해 지방으로 실사를 나간 지 하루 만에 정부 부처 과장에게서 “잡음이 나지 않게 실사를 잘 마무리하라”는 ‘업무 참고’ 전화를 받았다. 알고 보니 실사 대상 기관의 장이 지인인 이 과장에게 감사 무마 청탁을 넣은 것. 실사 대상 기관에 호랑이나 다름없던 C 차장도 자신의 갑을 통해 들어온 압력에 부담을 느껴 조사 수위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기업 간 비즈니스에서는 시간이 흘러 갑을 관계가 역전되기도 한다. 홈쇼핑업체의 D 바이어는 과거 무명이나 다름없던 생활용품 생산업체를 발굴해 홈쇼핑에 소개해 큰 성공을 안겨줬다. 하지만 브랜드가 유명해지면서 이 업체는 D 바이어의 갑으로 돌변했다 그는 “예전에는 무조건 우리 사정에 맞춰주던 업체들도 일단 성공하면 99%는 태도가 변한다고 보면 정답”이라며 “처지가 뒤바뀌면 서운함과 함께 갑을 관계의 무상함도 느껴진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고질적인 갑을 관계는 사회 구성원 사이의 거래비용을 높여 효율성을 떨어뜨릴뿐더러 사회 공존의 필수 조건인 구성원 사이의 신뢰 형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한다. 기업 간 거래의 경우 갑을 관계를 통해 갑이 이윤을 손쉽게 챙기는 구조가 고착되면 갑이 혁신의 필요성에 둔감해져서 결국 기업의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 고압적 상담 No 협력업체 상담실 카페처럼 바꾸고 ▼
부당한 요구 No 온라인 신문고 운영… 익명 제보받아


서울 성수동 이마트 본사의 협력회사 상담실. 불합리한 갑을 관계가 이뤄지지 않도록 내부를 개방형으로 꾸몄다. 이마트 제공
서울 성수동 이마트 본사의 협력회사 상담실. 불합리한 갑을 관계가 이뤄지지 않도록 내부를 개방형으로 꾸몄다. 이마트 제공
서울 성동구 성수동 신세계 이마트 본사 6층에 있는 ‘협력회사 상담실’.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며 소곤소곤 대화하는 모습이 마치 카페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 을이 편한 상담실을 짓자

지난해 12월 이마트가 약 5억 원을 들여 전면 개수한 이 상담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칸막이. 반투명 유리로 된 칸막이는 대화를 방해하지 않도록 낮게 설계돼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옆 테이블에서 상담하는 사람들의 머리가 내려다보였다. 이곳에서 만난 이마트 납품업체 한국네슬레의 서정철 팀장은 “상담실이 카페형으로 바뀐 후 예전보다 편한 분위기에서 바이어와 의견을 교환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마트 관계자는 “상담공간의 투명성과 개방성을 높여서 과거 폐쇄적인 구조의 상담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당한 요구나 압력을 차단하는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막강한 유통망과 구매력을 지렛대 삼아 납품업체에 단가를 후려치거나 과도한 견본품(샘플)을 요구하는 등 갑을 관계의 폐해가 심각한 업종이었던 유통업계에서도 ‘갑’이 먼저 이런 제도적 장치를 도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현대백화점 본사도 2009년부터 본사 상담실을 개방형 카페 형태로 개보수해 운영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근본적 해결책이 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문형구 고려대 교수(경영학)는 “갑이 ‘내가 힘이 세고 우월적 지위에 있으니 을을 좀 돕자’는 시각으로는 일회적인 시혜성 이벤트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며 “을에 대한 배려가 중장기적으로 갑의 생존과 이익에 필수라고 보는 갑의 인식 전환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 IT 활용 온라인 신문고

상담실 밖에서 은밀하게 이뤄지는 부당한 갑의 요구를 차단하기 위해 정보기술(IT)도 적극 활용되고 있다. 이마트는 자사 홈페이지에 협력회사가 바이어 등에게 겪은 부당한 요구 등을 비밀리에 제보할 수 있는 ‘협력회사 신문고’를 운영하고 있다. 온라인 신문고에 제보가 접수되면 사내 윤리추진팀이 출동해 사실관계 확인에 들어간다. 보복을 우려해 제보에 주저하는 일이 없도록 익명 제보도 가능하게 한 것이 특징이다. 롯데마트도 4월에 협력업체들의 칭찬이나 불만 제보는 물론이고 자사에 바라는 점 등을 제안받을 수 있는 ‘동반성장 사이트’(가칭)를 개설할 예정이다. 강형중 롯데마트 고객소통팀장은 “가치 있는 제안을 하는 협력업체에는 포상을 하는 방안도 마련 중”이라고 말했다.

‘을’에 대한 작은 배려를 실천하고 있는 기업도 많다. 홈쇼핑업체인 GS샵은 주차장을 설계하면서 주차 후 이동 동선이 가장 짧은 지하 주차장 2층을 협력업체 관계자에게 양보했다. 협력사 관계자들을 매년 초청해 GS샵 직원들이 결성한 직장인 밴드가 감사의 뜻으로 공연을 펼치기도 한다. 이제 시작 단계이지만 갑을의 공존을 향한 의미 있는 변화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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