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노믹스’]한국 물 산업 어디까지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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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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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정수시스템 속속 개발… 수십년 걸린 美-日 기술 따라잡아

국내 기업이 개발한 분리막 기술이 처음 적용된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아리수정수센터 내부. 이곳에서는 한강 물을 걸러 하루 30만 t의 수돗물을 서울시민에게 공급하는 데 이 가운데 5만 t을 국산 분리막 기술로 정수한다. 사진 제공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
국내 기업이 개발한 분리막 기술이 처음 적용된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아리수정수센터 내부. 이곳에서는 한강 물을 걸러 하루 30만 t의 수돗물을 서울시민에게 공급하는 데 이 가운데 5만 t을 국산 분리막 기술로 정수한다. 사진 제공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
한국은 그동안 물 산업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정수장들은 1908년 뚝섬 정수장이 건설된 이후 모래로 강물을 거르는 전통적인 모래여과 방식을 고집했다. 정부가 물 생산과 공급을 전담하면서 민간 기업이 성장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 세계 각국의 물 기업들은 미세한 불순물과 병원성 미생물까지 거르는 분리막(멤브레인) 공법 등 첨단 기술 개발에 나섰다. 신흥시장의 수 처리 관련 인프라와 운영 관리 사업에도 속속 진출했다. 세계 물 시장은 2025년 865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 때문에 대통령직속 녹색성장위원회(위원장 양수길), 환경부, 국토해양부 등을 중심으로 정부는 ‘최후의 자원’으로 불리는 물 산업 육성에 적극적이다. 국내 기업들도 앞 다퉈 물 관련 산업에 뛰어들고 있다. 최근 준공한 서울 영등포아리수정수센터에는 국내 기업이 개발한 분리막 기술과 공법이 처음 적용됐다. 이 분야는 미국 일본 독일 등이 세계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 부산에는 세계 최대 역삼투압 방식의 해수 담수화 시설이 건설되고 있다. 한국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지난달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부설 지역경쟁력센터와 글로벌 컨설팅사인 모니터그룹이 공동 조사한 세계 20개 물 경쟁력 선도국가(W20)의 물 산업경쟁력 평가에서 한국은 14위에 그쳤다. 하지만 물 관련 연구성과 수준 평가에서는 6위, 물 관련 특허 항목에서는 3위를 차지해 잠재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 5만 t 수돗물에 걸린 미래

지난달 말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아리수정수센터. 깨끗하게 단장된 건물 외벽에는 ‘최첨단 국산 막여과 정수장’이라는 대형 간판이 걸려 있었다. 1971년 건설된 영등포정수장은 4년 가까운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오존, 활성탄 등을 활용해 수돗물 특유의 비린 맛과 냄새를 제거하는 고도 정수처리 시설로 탈바꿈했다. 이곳에서는 한강 물을 걸러 하루 30만 t의 수돗물을 서울시민에게 공급한다. 이 가운데 5만 t이 국산 분리막 기술로 정수한 물이다. 중대형 정수장에 국산 분리막이 적용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시험 가동 중인 막여과 동에 들어서자 어른 허리둘레만 한 배관으로 연결된 대형 분리막 설비가 눈에 띄었다. 이곳에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분리막 공법인 가압식과 침지식 설비가 모두 설치됐다. 각 설비는 하루에 각 2만5000t의 물을 정수한다. 가압식은 국내 막 제조사인 에치투엘이 개발한 가압식 분리막을 적용해 대우건설이 시공한 설비다. 한화건설이 시공한 침지식 설비에는 코오롱인더스트리의 침지식 분리막이 들어갔다.

홍준식 수처리선진화사업단 연구관리팀장은 “일본 시장은 가압식, 미국 시장은 침지식이 주류를 차지한다는 점을 고려해 두 가지 기술을 동시에 개발해 상용화했다”며 “계측기 등 일부 부품을 제외하고 시설의 95% 이상을 국산화했다”고 말했다.

○ 원천기술 개발 경쟁 시동

일본은 1990년대부터 정부가 나서 전략적으로 물 소재 산업 육성을 시작했다. 한국도 정부의 정책적 지원과 물 기업의 핵심역량을 결집해 일본, 미국 기업이 수십 년간 개발한 분리막 기술을 6년여 만에 따라잡았다.

국내 연구진은 분리막 기술 국산화를 위해 일본과 미국의 분리막 기술을 적용한 소규모 실험 설비를 구의정수장에 설치하고 실험을 반복했다. 물을 보내는 배관이나 운영 관리 시스템을 최적화하지 못하면 분리막의 수명이 짧아지고, 에너지 소비량이 커진다. 가장 효과적인 공정을 찾아내기 위한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영등포아리수정수센터에 적용된 기술을 마침내 개발했다.

연경호 한화건설 선임연구원은 “시스템을 최적화하기 위해 배관이나 설비를 뜯고 다시 짓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며 “경쟁국이 걸고 넘어가지 않도록 특허를 깨기 위한 기술까지 함께 개발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 결과 영등포아리수정수센터의 막 여과 시설에만 특허 등 지적재산권 111건이 등록됐다. 국내는 물론 분리막 기술의 본산인 일본, 미국에서도 인증을 받았다. 기술 노출을 막기 위해 가압식에 강한 일본에는 침지식을, 침지식에 강한 미국에서는 가압식 인증을 신청했을 정도로 눈치전도 치열했다.

오희경 대우건설 선임연구원은 “외국산 분리막 기술을 시험 운영한 3년 치 데이터를 건설관리기술원에 보내 시뮬레이션하고 최적화된 운영 공법을 확보해 비용도 저렴하고 에너지 효율성과 경제성이 뛰어난 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원천 기술 확보를 위해서는 이스라엘과 같이 벤처캐피털과 기술 거래를 활성화해 연구개발과 사업화를 연계하는 전략도 필요하다.

○ 운영경험 축적이 반격의 원동력

정부는 2020년까지 8개의 세계적인 물 기업을 육성해 세계적인 물 산업 강국으로 도약한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코오롱과 웅진그룹 외에도 LG전자, 삼성엔지니어링 등 대기업도 최근 속속 물 산업 진출을 선언하고 있다. 한화건설, 대우건설, GS건설, 태영건설 등의 대형 건설사들도 물 산업 부문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

아직 갈 길은 멀다. 2008년 국내 물 산업의 해외 진출 규모는 약 15억 달러(약 1조8000억 원)로 세계 물 시장의 0.3%에 불과했다. 환경부에 따르면 부가가치가 높은 정보기술(IT)을 적용한 스마트 상수도와 지능형 상수도관망 분야 국내 기술력은 선진국 대비 각각 65%, 55%에 머물고 있다. 국내 물 기업의 한 관계자는 “자본력을 가진 대기업과 기술력을 가진 중소기업이 협력해 운영 경험을 신속하게 축적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처리 산업의 핵심 경쟁력은 안정적인 운영 역량이다. 싱가포르는 물 산업을 전략 산업으로 지정하고 관련 프로젝트에 자국 기업을 참여시켜 경험을 축적하는 방식으로 세계적인 물 기업인 하이플럭스를 키워냈다.

최근 수처리 운영 관리 분야는 단순 위탁이 아니라 시공과 운영을 아우르는 포괄 위탁 운영과 지역별 통합 운영 체제로 바뀌고 있다. 수처리 운영업체가 공사 발주까지 하는 추세여서 운영관리 사업에 진출하지 않으면 소재나 시공 사업도 따내기 힘든 구조다. 물 산업 전문가들은 부족한 기술력과 운영경험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략적 인수합병(M&A)을 통해 소재 개발, 컨설팅, 시공, 자금 조달, 운영 및 관리 등의 물 관련 토털 솔루션 역량을 확보할 필요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

▼ “더 적은 물로 더 많이 생산… 후발주자가 갈 길” 보카레티 매킨지컨설팅 이사 ▼

“수자원 사용의 효율성을 높이는 분야가 한국에 새로운 기회가 될 겁니다.”

세계적인 물 산업 전문가인 줄리오 보카레티 매킨지컨설팅 영국 런던사무소 이사(사진)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물 산업은 물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분야가 각광 받을 것”이라며 이같이 조언했다.

보카레티 이사는 현재와 같은 경제 성장과 인구 증가 추세가 지속된다면 2030년이면 수자원 공급이 세계 수요의 60%에 불과할 것으로 전망했다. 물 수요는 급증하는 반면 공급은 부족해 식수는 물론 공업용수조차 제대로 확보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관측이다.

그는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격 인상이나 소비 절감과 같은 수요 관리 노력도 중요하지만 물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신기술과 서비스를 통한 공급 관리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적으로 생활용수보다 공업용수와 농업용수 부족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에 샤워나 용변기의 물을 아껴 쓰는 식으로는 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게 보카레티 이사의 설명이다. 현재 세계 전력 및 산업 회사들이 쓰는 공업용수는 세계 물 수요의 16%를 차지하고 있는데, 2030년에는 22%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물 수요 증가분의 40%가 중국에서 발생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는 후발주자에게는 새로운 사업 기회를 뜻한다는 게 보카레티 이사의 주장이다. 한국도 수자원 사용 효율성 향상을 사업화해 물 산업 경쟁에서 승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음료 생산업체가 적은 물로 용기를 세척할 수 있는 기술을 발명하거나 물 소비를 덜하는 비료를 개발하는 방식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보카레티 이사는 “각국 정부도 규제 강화보다 이런 신기술에 대한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정책을 통해 물 산업을 육성하고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더 적은 물로 더 많은 생산을 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에너지 절감이고 친환경 산업”이라고 말했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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