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려난 둘중 1명은 진범”… 재수사 박차 ‘이태원殺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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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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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무부, 공소시효 3년 남기고 “美에 범죄인 인도 청구”

용의자 2명 서로 혐의 떠넘겨
1명은 항소심서 무죄 선고
1명은 특별사면뒤 美 출국

1997년 발생한 이태원 햄버거 가게 살인 사건을 소재로 올해 9월 개봉한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의 한 장면. 영화에서 살인용의자 역을 맡은 배우 장근석.
1997년 발생한 이태원 햄버거 가게 살인 사건을 소재로 올해 9월 개봉한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의 한 장면. 영화에서 살인용의자 역을 맡은 배우 장근석.
1997년 4월 3일 오후 11시.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버거킹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H대 학생 조중필 씨(당시 23세)가 흉기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됐다. 검찰은 당시 조 씨를 뒤따라 화장실로 들어간 한국계 미국인 에드워드 리 씨(32)를 살인 혐의로, 혼혈 미국인 아서 패터슨 씨(32)를 증거 인멸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그러나 리 씨는 2년에 걸친 재판 끝에 무죄판결이 났고, 패터슨 씨는 복역 중 특별사면을 받은 뒤 미국으로 출국했다. 이후 이 사건은 ‘둘 중 하나가 살인범이 확실하지만 둘 다 풀려난 해괴한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12년이 지난 최근 서울중앙지검 외사부(부장 함윤근)는 캐비닛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이 사건 기록을 꺼내 전면 재수사에 나섰다. 검찰은 살인 혐의로 패터슨 씨에 대한 범죄인 인도청구를 법무부에 요청했고, 법무부는 14일 “조만간 미국 정부에 범죄인 인도를 청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12년 전 사건의 전말

“I'll show you something cool, come in the bathroom with me(재미있는 걸 보여줄게, 화장실로 따라와 봐)!” 패터슨 씨와 리 씨 둘 중 누군가 이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한 사람의 손에는 날카로운 칼이 감춰져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이 나온 화장실에서 조 씨가 목과 가슴 등 9곳을 찔려 숨진 채 발견됐다.

사건 발생 직후 미 육군범죄수사대(CID)는 미 군속의 아들인 패터슨 씨가 유력한 살인용의자라며 그를 한국 측에 넘겼다. 그가 미국 내 갱단인 ‘노르테 14’의 단원이고,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말한 것을 주위 사람들이 들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사건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살인 혐의를 떠넘겼다. CID에서 “패터슨 씨가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던 증인도 말을 바꿨다. 거짓말탐지기를 동원한 결과 패터슨 씨의 진술이 대부분 ‘참’으로 나온 반면, 리 씨의 진술은 대부분 ‘거짓’으로 나왔다.

“목의 상처가 아래로 향하고 있어 조 씨보다 키가 크고 힘이 센 사람이 범행을 저질렀을 개연성이 높다”는 법의학자 소견도 리 씨가 범인이라는 데 확신을 더했다. 리 씨는 키가 180cm에 몸무게가 105kg이고, 패터슨 씨는 172cm에 63kg이었다. 검찰은 CID 조사 결과를 뒤집고 리 씨를 살인 혐의로, 패터슨 씨를 증거 인멸 및 흉기 소지 혐의로 기소했다.

○ 다시 재판 가능할까

1998년 1월 서울고법은 리 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지만 3개월 후 대법원은 이 사건을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 “패터슨 씨 진술의 신빙성이 의심스러워 리 씨가 단독범행을 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 이듬해 9월 리 씨는 무죄가 확정됐다.

한편 패터슨 씨는 1998년 1월 서울고법에서 징역 장기 1년 6개월, 단기 1년을 선고받고 상고를 포기한 채 복역하다 그해 8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패터슨 씨는 이듬해 8월 검찰이 출국금지를 연장하지 않은 틈을 타 미국으로 떠났다.

패터슨 씨를 살인용의자로 다시 지목한 검찰은 미국 정부에서 그의 신병을 넘겨받으면 12년 전보다 훨씬 발전한 과학수사 기법을 동원해 진상을 밝혀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미국 정부와 법원이 패터슨 씨를 빠른 시간 안에 넘겨줄지는 미지수다. 범죄인 인도를 위해선 미국 법원에서 세 차례의 재판을 거쳐야 하는데 길게는 1년이 걸린다. 미국연방헌법의 ‘이중위험(double jeopardy) 금지’ 원칙도 범죄인 인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누구라도 동일한 범행으로 생명이나 신체에 대한 위협을 재차 받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 왜 이제 범죄인 인도 청구하나

1998년 4월 대법원이 살인 혐의로 기소된 리 씨에 대해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하자 조 씨의 유가족들은 곧바로 패터슨 씨를 살인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서울지검은 2000년 11월과 2002년 1월 두 차례 미국 정부에 관련 참고인들을 조사할 수 있도록 사법공조 요청을 했지만 답변을 얻지 못한 채 2002년 10월 기소 중지 결정을 내렸다.

올해 9월 이 사건을 다룬 영화 ‘이태원살인사건’이 상영되면서 이 사건은 재조명을 받게 됐다. 검찰은 살인죄의 공소시효(15년)가 3년밖에 남지 않았고, 패터슨 씨의 신병 인도가 언제 이뤄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서둘러 인도 요청을 하지 않으면 기소 자체가 힘들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법무부 관계자는 “최대한 빨리 패터슨 씨의 신병을 넘겨받아 꼭 진실을 밝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전성철 기자 dawn@donga.com

:이태원 살인사건:

1997년 4월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H대 학생 조중필 씨가 흉기에 찔려 살해된 사건. 조 씨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에드워드 리 씨는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고, 유력한 살인용의자였던 아서 패터슨 씨는 다른 혐의로 기소돼 복역 중 특별사면을 받아 미국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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