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하정규]이태원 살인사건과 진짜 법정

동아일보 입력 2009-10-04 21:23수정 2009-10-29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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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듣고 '살인의 추억'이나 '추격자' 같은 범죄 스릴러 혹은 액션물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실망할 것이다. 혹시 CSI 같은 과학 수사물을 고대한 사람들이나 엄청난 반전이 숨어 있는 전형적인 미국식 법정 영화를 상상한 관객도 실망할지 모른다.

이것이 이 영화에 대한 누리꾼 평점이 유독 낮은 이유일 것 같다. 그러나 미국식 첨단 테크놀로지와 권선징악적 범죄물에 식상한 관객이라면 실제 사건을 4년간 고증하여 제작한 이 영화속에서 범죄와 재판에 대한 보다 리얼하고 현실적인 모습이 주는 재미를 충분히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 CSI 그 정반대는?

근년 들어 CSI와 같은 과학범죄 수사물들이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범죄현장에서 발견된 실오라기 같은 작은 단서들이 첨단 과학수사를 통해 결정적 증거가 되어 범인을 찾아내는 과정은 정말 극적이고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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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필자는 정말 저렇게 컴퓨터 스크린에 모든 자료를 순식간에 띄워서 첨단 기법으로 처리할 수 있을까, 정말 낮은 해상도의 CCTV 화면를 확대하면 순식간에 깨알 같은 글씨조차 알아볼 수 있을까, 도시나 건물 구조, 모든 사람들의 인적 자료까지 저렇게 쉽게 온라인에서 검색할 수 있을까 의문을 품으면서 비현실적인 첨단 테크놀로지에 짜증이 날 때가 있다.

그런 와중에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정말 황당하면서도 인상 깊었다. 잔인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던 현장에 검사가 도착해보니 시신이 치워졌을 뿐만 아니라 피투성이였던 화장실은 어처구니없게도 가게 직원에 의해 이미 말끔히 청소까지 되어 있었다.

여러 개의 경찰라인이 쳐진 가운데 많은 수사요원들이 사진을 찍고 철저히 현장조사 중인 장면을 기대했던 관객에게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모습이다. 물론 최근에는 우리 수사현장이 이렇지는 않겠지만 이미 10여년 전 일이라면 있을 수도 있는 일일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 영화의 독특한 매력이다.

하물며 수사물에서 늘 등장하는 그 흔한 빔프로젝터 브리핑 장면 한번 없으면서도 담백하면서 치열한 법정 공방, 주연과 조연들의 뛰어난 연기, 누가 범인인지 혼란스러운 미스테리 등이 사실적이고 흥미로운 긴장을 지속적으로 끌고 나간다.

● '내가 재밌는 걸 보여줄께'

알렉스와 피어슨이라는 10대 교포 두 명이 이태원의 어느 햄버거 가게 안 친구들 앞에서 칼을 꺼내 서로의 객기를 뽐내다가 한 명이 '재밌는 걸 보여주겠다'고 해서 둘이 화장실로 들어간 후 소변을 보던 무고한 대학생이 대낮에 칼로 10여차례 찔려 죽은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피의자가 미군무원 자녀라는 이유로 1차 수사는 미 수사기관에서 이루어지고 피묻은 증거물을 갖고 있던 피어슨이 범인으로 지목되지만 수사 결과를 넘겨받은 한국 검사는 부검 결과 등을 토대로 오히려 범인은 알렉스라고 결론짓고 그를 살인죄로 기소한다.

재판에서 알렉스와 피어슨은 서로가 상대방이 범인이고 자신은 결백하다고 주장하게 되고 검사는 검찰 선배 출신인 변호사와의 치열한 공방과 심리전 속에서 알렉스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한다. 그는 때때로 복잡한 정황과 피어슨의 수상한 태도 속에서 때로 피어슨이 범인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하는 의혹 속에 갈등하게 된다.

법정에서 말을 번복하는 증인도 나오고 미 수사요원도 증언에 나서는 등 치열한 범정 싸움이 진행되지만 결국 알렉스에게 불리한 현장검증 결과와 결정적인 친구 증언이 나오면서 검사의 기소대로 결국 1심에서 알렉스는 유죄 및 무기징역을 언도받게 된다.

그러나 알렉스의 아버지는 법률회사의 대규모 변호인단의 힘을 빌리면서 결국 대법원까지 가는 장기 재판 끝에 유가족들의 실망과 분노에도 불구하고 두 명 모두 증거 불충분으로 살인혐의에서 무죄로 풀려나는 황당한 결과가 나온다.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된 알렉스를 만난 변호사와 증거물 은닉죄 형기를 마치고 풀려나는 피어슨을 만난 검사는 각각 자신들이 그토록 치열하게 변호했던 그들의 모습에서 오히려 아직도 남아 있는 미심쩍음을 느끼게 된다.

● 진짜 법정 싸움을 알고 싶어?

필자도 법정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법정에서 진실을 다투는 영화는 검사측와 변호사측간에 치열한 두뇌 싸움과 심리전, 피의자와 증인 등 다양한 요소들이 등장하고 특히 극적인 반전도 일어나기 때문에 스릴이 넘친다.

그러나 이 영화는 핸섬하고 머리 좋고 정의로움까지 갖춘 검사나 변호사가 치열한 법정 싸움 와중에 섹시한 미녀와 사랑에도 빠지는 미국식 법정물과는 거리가 멀다. 휴일에는 파자마와 런닝 바람으로 누워서 TV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중년 검사의 모습은 왜 이 영화가 한국적 법정 영화인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특히 정의와 불의가 분명한 전형적인 미국식 법정 영화와는 차원이 다르다. 누가 범인인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알렉스의 유죄와 피어슨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 검사 조차도 때때로 누가 진정한 범인인지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은 또 다른 차원의 재미를 보여준다. 그래서 '강철중' 검사와는 전혀 다른, 이 영화의 주인공 검사의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매력에 이끌리게 된다.

이 영화에는 피의자인 알렉스와 피어슨 외에도 변호사, 아버지, 변호인단, 미국측 변호인, 다양한 증인들도 등장하지만 헐리우드식의 완전한 악역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기존의 범죄물에 익숙한 관객은 맥이 빠진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필자에게는 오히려 신선하고 공감이 가는 대목이었다.

또한 법정과 관련된 다양한 모습-즉 변호사와 검사간의 선후배 갈등, 검찰 내의 조직 질서, 증인들의 불분명하고 번복되는 태도, 한국과 미국 수사 기관간 갈등 등 현실적인 법정 묘사가 너무나 잘 표현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특별한 극적 반전도 없고 잔인한 범죄 장면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런 액션 장면도 없지만 사실적인 법정 공방과 아울러 조연들과 단역들의 뛰어난 연기는 언뜻 밋밋한 듯 보이는 장면들에서도 흥미 있는 볼거리들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다소 샌님 같은 느낌을 주면서도 공정하고 인간적 모습까지 갖춘, 현실에서 바로 가져온 듯한 1심 판사의 캐릭터는 필자 개인적으로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 재판으로 진실이 밝혀질 수 있는가?

필자는 직접 송사를 경험한 적은 없지만 그런 경험을 해 본 사람들로부터 재판이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 그리고 노력이 소모되며 증인과 증거 확보가 얼마나 어렵고, 그 복잡하고 지루한 과정에서 진실 규명이 얼마나 힘들고, 또 결과적으로 얼마나 억울한 일도 많은지를 여러 차례 들은 경험이 있다.

미국인의 90% 이상이 유죄라고 믿는다는 OJ심슨도 결국 무죄로 풀려난 점을 볼 때 법정에서 정의를 판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미국식 소송 만능주의와 함께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소송의 특성 때문에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명심해야 할 것은 오늘날 민주적인 형사재판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100명의 범인은 놓쳐도 1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라는 말처럼 무엇보다 인권을 최우선시하는 원칙이다. 따라서 명백한 물증이나 증인 없이는 정황증거만으로 유죄를 만들 수가 없다.

두 명 중 한 명은 범인이라는 사실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두 명 다 무죄로 풀려나는 이 영화의 아이러니는 한편으로 이 같은 철학적 기초에서 나온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사법의 다양한 현실과 모습들을 리얼하게 반영하고 있는 이 영화는 한국식 사실적 법정 영화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말하고 싶다.

● 당신이 검사라면?

영화를 보면서 필자도 누가 진짜 범인인가를 골똘히 추리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둘이 함께 짜고 같이 살인을 저지른 다음 나중에 발각되자 서로에게 책임을 미룬 것이 아닐까? 하지만 실제 사건조차도 결국 미궁에 빠진 채로 종결되었으므로 그야말로 '진실은 저 너머에'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필자를 더 괴롭힌 또 다른 질문은 만일 내가 저런 검사라면 또는 저런 변호사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내가 기소한 범인에 대해 재판 과정에서 자꾸 아닌 것 같은 의구심이 든다면? 거꾸로 내가 변호해야 하는 사람이 아무래도 진짜 범인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끝까지 직업적 본분에 충실할 것인가? 어렵더라도 인간적인 선택을 할 것인가? 실제 법정의 현실 속에는 이런 고뇌도 존재할 것이다.

필자의 결론은? 법조계로 안가길 잘했다는 것이다.^^

하정규 한국EFT코칭센터 소장·전직 외교관 ckha9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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