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사범 한마디에 ‘뇌물경찰’로

  • 입력 2009년 9월 9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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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뇌물 수수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됐다가 최근 법원에서 뇌물 혐의에 대해 무죄 확정판결을 받은 임정일 경위. 그가 8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청사 앞에서 잃어버린 1년의 고통을 토로하고 있다. 전영한 기자
지난해 10월 뇌물 수수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됐다가 최근 법원에서 뇌물 혐의에 대해 무죄 확정판결을 받은 임정일 경위. 그가 8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청사 앞에서 잃어버린 1년의 고통을 토로하고 있다. 전영한 기자
■ 복직 앞둔 임정일 경위 ‘고통의 1년’

檢, 혐의 벗자 다른 죄목 또 기소
법원서 11개월만에 무죄 확정
“전형적 먼지떨이 수사” 지적
檢 “몰아가기식 아니다” 항변

《김준규 검찰총장은 지난달 20일 취임하면서 “앞으로 수사는 신사답게, 페어플레이정신, 명예와 배려를 소중히 해야 한다”며 검찰 수사의 패러다임을 바꾸자고 했다. 그동안 논란이 돼 온 ‘표적수사’나 ‘먼지떨이 수사’ 관행을 어떻게 없애나갈지, 피의자의 인권과 방어권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를 놓고 검찰 중간간부들과 직접 만나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부패에 대한 검찰 수사는 엄정해야 하지만 자칫 무리한 수사는 개인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다. 검찰 수사로 고통을 겪었던 한 경찰관의 ‘잃어버린 1년’을 들여다봤다.》

○ 강력팀장서 뇌물 경찰관으로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곧 진실이 밝혀질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마약범죄자들은 뇌물사건 제보자가 됐고 현직 경찰간부였던 그는 범죄자가 됐다.

지난해 10월 8일 당시 서울강남경찰서 강력팀장이던 임정일 경위(43)는 수원지검 마약조직범죄수사부에 긴급 체포됐다. 검찰은 그에게 서울송파경찰서 강력팀장으로 근무하던 2005년 8월 마약 혐의 피의자 이모 씨(51)에게서 사건무마 청탁과 함께 마약수사 정보원인 박모 씨(43)를 통해 5000만 원을 받은 사실을 인정하라고 추궁했다. 그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구속됐고 ‘뇌물 경찰관’의 오명을 써야 했다.

18년 경찰생활을 뇌물과 맞바꿨다는 누명을 벗기 위해 강하게 반박했지만 그럴수록 수사는 더욱 옥죄어 왔다. 검찰은 구속 직후 20일 동안 면회를 금지시켰다. 오전에 검찰청으로 불러놓고 한참을 대기시키다 한두 시간 조사하고는 오후 늦게 구치소로 돌려보내는 이른바 ‘불러뽕’을 당하는 일도 잦았다. 검찰은 그가 돈을 받았다는 시점(2005년 8월)보다 한참 전인 2000년 6월부터 그가 체포되기 직전까지 8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가 주변사람들과 돈거래를 한 기록도 샅샅이 뒤졌다. 그와 금전거래가 있었던 변호사 A 씨와 그 사무실 직원들도 검찰의 계좌추적 대상이 됐다. 임 경위는 8일 “항상 수갑을 차고 포승줄에 묶인 상태로 검찰 조사를 받아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일부 강력범을 제외하면 포승줄에 묶여 조사받는 사례는 드물다.

○ 혐의 부인하자 또 다른 뇌물 혐의까지

임 경위가 혐의를 계속 부인하자 검찰은 또 다른 뇌물 혐의를 보탰다. 정보원 박 씨 등이 2005년 8월 또 다른 마약 혐의자에게서 수사무마 청탁과 함께 3700만 원을 받는 과정에 그가 공모한 혐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서울동부지검은 이미 2005년 이 사건을 수사해 박 씨 등을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처벌했지만 당시 임 경위가 연루된 흔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검찰은 3년이 지난 시점에 이 사건을 다시 꺼내 박 씨 등이 돈을 받은 것이 임 경위의 업무와 관련이 있다고 몰아세웠다. 공소장엔 임 경위가 마약 혐의 피의자들을 정보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마약검사 기록을 은닉하고 이들이 갖고 있던 마약을 몰래 버리게 했다는 혐의도 포함됐다. 모두 박 씨 등의 진술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검찰은 “마약사범들만 믿고 경찰관의 진술은 왜 믿지 않느냐”는 항변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희망은 뜻밖의 순간에 찾아왔다. 뇌물을 건넸다던 박 씨가 올 1월 재판부에 “사실은 내가 돈을 받아 챙겼다”고 털어놨고 박 씨 관련 계좌에 돈이 입금된 사실도 확인됐다. 정보원으로 활동하면서 금품을 받아 챙기다 처벌받은 것에 앙심을 품고 거짓말한 것이 밝혀진 것이다. 임 경위는 구속된 지 4개월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 뇌물 혐의 무죄…물러서지 않는 검찰

검찰은 임 경위가 뇌물을 받지 않은 사실이 밝혀지자 이번엔 ‘박 씨 등이 5000만 원을 받는 과정에 임 경위가 모의했다’며 그를 뇌물 수수의 공범으로 바꿔 기소했다. 이 혐의가 인정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임 경위가 박 씨 등이 돈을 받아 챙기는 데 수월하도록 도움을 준 혐의(변호사법 위반 방조)로 처벌해 달라’는 내용까지 공소장에 넣었다.

하지만 법원은 4월 “박 씨 등이 조직적인 거짓말로 임 경위를 음해했다”며 검찰이 기소한 두 가지 뇌물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은 임 경위가 마약수사 과정에서 한 정보원에게 히로뽕 0.2g을 버리게 한 혐의만 유죄를 인정해 벌금형을 선고했다. 임 경위가 “현실적으로 정보원의 도움 없이는 마약사범을 검거하기 힘들어 정보원의 범법행위를 눈감아 줬다”고 한 것은 검찰 수사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인정한 부분이었다.

검찰은 이번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곧바로 항소했고 임 경위는 법정에서 검찰과 4개월을 더 싸워야 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다시 그의 손을 들어줬고 판결은 지난달 말 확정됐다. 11개월 만이었다.

○ “무리한 수사 아니다”

임 경위는 며칠 전 고향을 찾아 할아버지 산소를 이장했다. 집안의 다른 친지들은 올 초 이장을 모두 마쳤지만 그는 결백이 밝혀진 뒤 떳떳하게 고향에 내려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싶어 이장을 미뤄왔다. 그는 ‘잃어버린 1년’에 대해 “매일 새벽 등산으로 울분을 달랬다”고 말했다.

검찰 수사 관계자는 “임 경위가 뇌물을 받지는 않았지만 정보원이 돈 챙기는 것을 눈감아주고 소지한 마약을 버리게 하는 등 부적절하게 수사한 정황이 있다고 판단했다”며 “법원도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 무죄 판결을 내렸을 뿐 임 경위가 계좌의 존재 등을 묵인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지 않았느냐”고 해명했다. 또 “결코 무리한 몰아가기 수사가 아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고위 법관 출신의 변호사는 “뇌물 혐의가 벗겨진 뒤에도 검찰이 공소 취소를 하지 않고 오히려 혐의를 덧씌운 것은 임 경위를 엮어 넣으려고 무리수를 둔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 간부 출신 변호사도 “전형적인 먼지떨이 수사”라고 지적했다.

임 경위는 이제 복직을 준비하고 있다. 직위해제로 입은 경제적 피해에 대해서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낼 계획이다. 하지만 그가 진정 바라는 것은 딱 하나다. 검찰이 아닌 범죄자와 싸우던 예전의 강력팀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종식 기자 bel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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