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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1월 9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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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서울대교구 정진석(78) 추기경은 8일 오전 서울 명동대성당 옆 주교관에서 신경숙(46) 작가와 가진 인터뷰에서 “물질적 풍요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화”라며 “경제위기로 삶이 힘들지만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정 추기경은 최근 정치 상황에 대해서도 “국회가 파행을 거듭하고 있는 모습이나 지난해 불교계를 중심으로 한 정부의 종교 편향 시비는 기본적으로 신뢰가 부족해서 발생한 문제”라며 “서로 믿지 않으면 대화가 이뤄질 수 없기 때문에 신뢰 회복을 위한 절실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인터뷰는 1시간 반에 걸쳐 진행됐으며 정 추기경은 신 작가의 질문에 시종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답변했다. 신 작가는 “추기경의 인간적인 모습과 세상에 대한 적확하고도 따뜻한 시선, 풍부한 유머를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경제위기로 어려움을 겪는 분이 많습니다. 새해 덕담을 부탁드립니다.
“지구상에서 끊임없이 분쟁이 벌어지고 있어 새해 들어 더욱 간절하게 평화를 기도했습니다. 꿈을 잃지 말고 자신이 속한 가장 작은 울타리인 가정에서부터 평화를 이루기 바랍니다.”
―가정의 평화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허물이 없고 자기편이라고 생각해서인지 더 싸늘하게 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해 첫날 성당 신자들에게 집안에서 욕하지 않는 작은 실천을 권했습니다. 부부 싸움을 할 때 아이들이 욕을 배워요. 물질이 부족하다고 가정에서 쓰는 말이 거칠어진다면 곤란합니다. 살림살이가 어려워질수록 위로의 말, 아름다운 말이 가정에 평화를 만들어 줍니다.”
―취업난으로 꿈을 잃어버려 방황하는 20대 젊은이가 많습니다.
“인생 선배로서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자신만을 위해 살려고 하면 더 힘들어집니다. 많은 사람과 공유하는 꿈을 가지면 길이 열리고 좋은 희망을 품으면 반드시 공감하는 사람, 협조하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대한민국은 격동의 근현대사를 차근차근 헤쳐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근 우리 사회의 갈등은 신문 보기가 괴로울 정도인데요.
“어느 사회이든지 산술적인 공평은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왜 망하느냐면 산술적 평균을 추구하다 보니 감독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선 자발성이 없죠. 그게 (공산주의가 망한) 뿌리죠. 국가가 통제하면 자발성이 말살됩니다. 정의감이 용납될 만큼 공정해야 하는데…. 돈 가진 이에 대한 적개심도 합당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제도 중에서 낫다는 게 민주주의인데, 불완전할뿐더러 진리가 아닙니다. 결국 지도자에게 달려 있는데 성군을 맞이한 백성은 축복을 받으며 사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조금 힘들게 사는 거죠. 우리 지도자들이 많이 깨달아야겠지요.”
“나도 제대로 못해 송구스럽지만 국민을 위하고 언제나 귀를 열어 놓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얘기 속에 욕심이 있거나 속마음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솔로몬이 하느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한 것처럼 대통령도 옥석을 가릴 수 있는 지혜를 청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남북 관계가 경색되고 있습니다. 추기경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아흔이 넘은 노모와 자식이 만나겠다는 이산가족 상봉만 제대로 돼도 대한민국 국민은 (북한에) ‘얼마든지 퍼주라’고 할 텐데 그렇게 되지 못하고, 투명하지 못해 문제가 생겼습니다. 남북 양측이 하루빨리 인도주의적 교류만이라도 활성화하길 바랍니다. 통일도 구별해서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평화는 가능하지만 엄청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핵무기도 걸려 있고. 양 체제 간의 평화공존이 이뤄져야 민간교류가 확대될 텐데. 그 물꼬를 트는 게 이산가족일 것입니다.”
―와병 중인 김수환 추기경님의 근황은 어떠신지요.
“많이 좋아지셨는데 지난해 성탄절 때 감기에 걸리셨어요. 빨리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30년간 김 추기경님은 약자를 보살피는 상징적 존재였습니다. 한국 가톨릭계가 큰 빚을 졌고 함께 덕도 보고 있는 거죠.”
정 추기경은 지난해 말 ‘믿음으로 위기를 극복한 성왕 다윗’을 출간했다. 신 작가는 자신은 인연을 맺지 못했지만 가족은 대부분 가톨릭 신자라며 가톨릭을 배경으로 한 소설 ‘리진’ ‘엄마를 부탁해’를 추기경에게 선물로 건넸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엄마에게 맞춰졌다.
―추기경님의 글이나 인터뷰에서 어머니 얘기를 감동 깊게 읽었습니다. ‘신은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외국의 격언을 인용하면서 어머니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에게서도 똑같이 들을 수 있는 얘기지만 당연히 어머니가 없으면 내가 있을 수 없죠.(웃음) 실제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어머니의 영향과 은덕입니다. 나중에 친척에게서 들은 얘기인데 당시 서울에는 돌림병도 돌고 유아사망률이 높아 젖동냥을 주지 않는 분위기였답니다. 근데 ‘우리 엄마’는 젖동냥을 주셨어요. 내가 먹을 젖은 정해 놓고 다른 쪽은 다른 아이들을 위한 거였죠. 6·25전쟁의 경험과 엄마의 젖동냥에 담긴 뜻을 평생 마음에 두고 살아왔습니다. 앞으로의 인생은 덤이라는 거죠.”
―추기경으로서 평생 뜻을 세워 놓으신 일이 있다면….
“살면서 여러분께 받은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 숙제를 열심히 하면서 세상을 떠날 것 같습니다. 주변 다른 분들의 뒷받침이 없으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 정진석 추기경은
△1931년 서울 출생
△서울대 화학공학과 중퇴
△1961년 가톨릭대 신학부 졸업, 사제 서품
△1961∼67년 성신고 교사, 부교장
△1970년 주교 서품
△1996년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1998년∼ 서울대교구 교구장 및 평양교구 교구장 서리
△2000년 서강대 명예법학박사
△2006년 추기경 서임
○ 소설가 신경숙 씨는
△1963년 전북 정읍 출생
△1984년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졸업
△1985년 중편 ‘겨울우화’로 등단
△주요 작품 ‘풍금이 있던 자리’(1993년) ‘깊은 슬픔’(1994년) ‘바이올렛’(2001년) ‘리진’(2007년) ‘엄마를 부탁해’(2008년)
▼ 세례명 ‘니콜라오’처럼 나눔이 몸에 밴 분 ▼
■ 신경숙 씨가 본 鄭추기경
내가 다니던 대학교가 남산에 있었다. 집은 동숭동에 있었다. 걷는 일에 심취했던 때라 명동성당을 끼고 그 길을 2년 동안 걸어 다녔다.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최루가스를 들이마시면서.
추기경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 집에 가다가 혹은 학교를 가다가 자주 성당 안으로 들어가 나무의자에 앉아 있곤 했던 그 스무 살 시절이 떠올랐다. 가톨릭 신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기 앉아 있는 게 좋았다. 지난 시대 천막이 쳐지고 노동자들과 교사들의 단식 농성이 벌어지던 명동성당, 그 첨탑을 오전 10시에 올려다 본 일은 처음이었다.
추기경님이 계신 방은 겨울 햇빛이 온화하게 퍼졌다.
거기에 일생 동안 화를 한 번도 내보지 않았을 것 같은 추기경님이 반갑게 우리 일행을 맞이해 주셨다. 큰 어른이니 권위적이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유쾌하고 솔직하셨다.
추기경님의 세례명 니콜라오는 영어권에서 산타클로스로 부른다. 세례명처럼 무슨 선물인가를 주실 것 같이 인자하고 온유한 모습을 한 분과 1시간 반 동안 꼬박 대화를 나누는 축복을 일을 핑계 삼아 개인적으로도 누렸다.
어떤 질문을 하든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가 함께 협력해서 적극적으로 희망을 찾아가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긴 답이 돌아왔다. 전쟁 때 이미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라며 이후의 생은 덤으로 여겼고 덤이니 모두에게 나누어 주며 살겠다고 생각한 것이 오늘날의 그분을 만든 것 같았다. 나눔이 몸에 밴 분이었다.
대담을 하러 가기 전에 나는 추기경님의 어머니에 대한 글과 인터뷰를 읽게 되었고,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을 만큼 감동을 받았으므로 추기경님께 있어 어머니의 존재란 어떤 의미인지를 물었을 때다. 세상에, 추기경님이 얼굴빛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엄마라고 호칭하셨다.
아, 추기경님께 엄마라는 말을 듣다니! 그 순간 얼마간 남아 있던 긴장이 확 풀어지며 그분이 너무나 친근하게 느껴져 그만 옆집 어른 앞에서나 나올 법한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곧 왜 엄마라고 부르게 됐는지에 대한 사연을 들으며 고개가 숙여졌지만.
사회 분위기가 어두울 때일수록 큰 어른들의 귀한 말씀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실감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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