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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2월 13일 02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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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법 사상 처음으로 일반 시민이 재판에 참여하는 ‘국민참여재판(배심재판)’이 12일 오후 2시 대구지법 11호 대법정에서 형사합의11부(부장판사 윤종구) 심리로 열렸다.
배심재판은 직업 법관이 아닌 일반 시민이 형사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여해 피고인의 유무죄를 가리고 양형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제도.
지난해 제정된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올 1월 1일부터 시행됐다. 시민의 상식적 견해를 판결에 반영한다는 취지다.
이날 재판에선 미국 법정 드라마처럼 검사와 변호인이 치열하게 공방을 벌이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공소사실이 간단한 강도상해 사건이고 피고인이 혐의를 대체로 시인했기 때문이다.
검사와 변호인은 번갈아 가며 법정 한가운데로 나오면서 재판부뿐 아니라 배심원에게도 깍듯이 인사했다.
이날 재판에는 내년 5월부터 배심제를 다시 도입하는 일본 법무성 검사를 비롯해 내외신 기자들이 몰렸다. 일본은 1928년부터 15년간 배심제를 시행하다 중단했다.
▽검사, 범죄 피해의 심각성 부각=이날 재판은 이모(28) 씨가 지난해 12월 26일 대구 남구 대명동 정모(71·여) 씨의 집에 들어가 정 씨를 흉기로 위협하고 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을 심리했다. 당시 이 씨는 셋방을 구하는 것처럼 위장했다.
검찰은 사건 개요를 설명하면서 이 씨가 전에도 특수절도와 병역법 위반 혐의로 처벌받은 전과자임을 거론했다. ‘피고인은 범죄자’라는 인상을 배심원에게 심어주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배심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슬라이드 화면도 준비했다. 핏자국이 낭자한 범행 현장과 피로 범벅이 된 70대 피해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일부 여성 배심원은 얼굴을 찌푸리기도 했다.
검찰은 피고인이 사용했던 피 묻은 칼과 입막음용 테이프, 장갑 같은 증거물도 배심원들에게 보여준 뒤 “피해자가 피고인에 대한 선처를 바라고 있지만 법의 엄정함이 살아있음을 보여줘야 한다”고 배심원들에게 호소했다.
변호인은 이 씨가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사업 부도로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고 △오토바이 사고의 합의금을 내느라 사채를 끌어 썼고 △돈을 갚기 위해 범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자세히 설명했다.
변호인은 “사채업자가 이 씨의 하나뿐인 여동생에게까지 전화해 빚 독촉과 협박을 하는 바람에 한순간 실수를 하게 됐지만 지금은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있다”고 말했다.
변호인은 이어 증인으로 출석한 피해자에게 “경찰 조사단계에서 피고인에 대한 선처를 바란다고 진술했고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죠”라고 물었다.
피해자가 “네”라고 짧게 대답하자 변호인은 배심원단 쪽으로 몸을 돌려 “들었죠”라고 동의를 구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씨의 여동생도 아기를 안고 법정 증인으로 나와 눈물을 글썽이며 진술했다. 배심원들은 딱한 표정을 지었다.
▽배심원단, 한 번도 질문 안 해=배심원 12명(예비 배심원 3명 포함)은 이날 질문을 전혀 하지 않았다.
재판장은 “검찰과 변호인의 신문사항이나 입증계획과 관련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하라”고 5, 6차례나 말했지만 배심원단은 침묵을 지켰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하라”는 재판장의 얘기가 있을 때마다 대다수 배심원은 고개를 숙였다.
한 배심원은 “검사가 하는 말을 들으면 피고인이 아주 나쁜 범죄자 같았지만 변호사가 하는 얘기를 들으면 피고인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말했다.
배심원단은 3시간 45분간의 심리를 마친 뒤 1시간 45분 정도 피고인의 유무죄 및 형량에 대해 평의했다.
배심원단은 이 씨의 유죄를 인정하면서 전원일치의 의견으로 징역형에 집행유예를 택했다. 재판부는 배심원단의 의견이 헌법과 법률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단해 그대로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이 씨에게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하고 80시간의 사회봉사를 명령했다.
변호인은 이번 판결에 대해 “배심재판이 피고인에게 유리했다고 본다”며 “재판부가 형량을 감경하더라도 실형을 선고할 수 있었는데 집행유예라는 배심원단의 만장일치 의견을 무시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구=이종석 기자 w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