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학교에 마을도서관을]다시 찾아본 ‘도서관 사람들’

  • 입력 2007년 12월 27일 02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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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삼매… 아이도 어른도 달라졌어요”

《“풀잎새 따다가 엮었어요. 예쁜 꽃송이도 넣었고요. 그대 노을빛에 머리 곱게 물들면, 예쁜 꽃 모자 씌어주고파∼.” 조용한 음색은 어느새 합창이 됐다. ‘어느 산골 소녀의 사랑 이야기’를 목청껏 따라 부르는 아이들의 눈망울. 칼바람 산골 날씨도 산마루 너머 봄볕처럼 싱그럽다. 20일 강원 홍천군 주봉초교. 2007년의 마지막이자 ‘학교마을도서관 96호’의 개관식이 열렸다. 올해만 꼽아도 28번째 문을 여는 도서관이다. ‘작은 도서관 만드는 사람들’(대표 김수연)과 본보, 네이버가 함께하는 ‘고향 학교에 마을 도서관을’은 가수 예민 씨 및 스무 명 아이들(분교 전교생 다해서)의 화음으로 한 해를 마무리했다.》

본보를 통해 9월 10일 충북 진천군 금구초교에서 시작된 학교마을도서관 캠페인은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최전방 민간인출입통제구역(강원 화천군 산양초교)부터 제주도(제주시 한경면 고산초교)까지. 산간벽지와 섬마을을 한 달에 서너 차례씩 찾아갔다.

‘고향 학교에 마을 도서관을’은 문화적 혜택이 부족한 농촌 지역 주민과 아이들을 위해 작은 도서관을 만드는 캠페인. 하지만 다녀온 기자들은 모두 말했다. “뭔가 주고 온 게 아니라 받고 온 기분”이라고. 도시에선 접하기 힘든, 책과 자연이 어우러진 도서관. 그곳에 숨쉬는 사람들을 다시 찾았다.

○ “도서관에서 살아요”

“요즘도 학교마을도서관에서 산당께요. 최근 정기검진도 받았는디 매우 좋아졌다고 하더구만이라. 책을 가까이 함서 (성격이) 밝아진 게 큰 힘이 돼 줬던갑소.”

인공심장을 달고 책에 대한 꿈을 놓지 않던 전남 장성군 북일초교의 김윤호(본보 9월 28일자) 군. 그런 아들이 좋아하는 도서관 도우미로 나섰던 어머니 변정아(43) 씨의 목소리는 밝았다. 2002년 첫 수술 뒤 다섯 번이나 더 수술을 받으며 힘든 시기를 거쳤지만 이젠 안정을 찾은 눈치다.

본보에 그 사연이 보도된 뒤 세간의 갑작스러운 관심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변 씨는 도서관 도우미 일을 빼먹지 않는다. “윤호가 엄마가 오면 더 기뻐하며 책을 읽어서”다. 요즘 윤호는 책 말고도 관심거리가 생겼다. 도서관에서 한 달에 1, 2번씩 상영하는 영화도 꼭 챙겨 본다.

아빠 엄마를 위한 ‘책 배달부’ 강노을(10월 20일자) 양은 요즘도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한다. 특히 엄마 최부용 씨의 적극적인 변화가 반갑다. 노을이가 강원 춘천시 송화초교 학교마을도서관에서 빌려오는 책에 만족하지 않고 아들이 다니는 대학의 도서관까지 직접 찾아가 책을 빌려온다. 최근에도 황석영 작가의 ‘손님’을 빌렸다.

“방학이지만 요즘도 매일 도서관에 가요. 엄마가 겨울철 농한기니 이 틈에 책을 더 많이 읽겠다고 하셨거든요. 최근에도 ‘남한산성’ ‘칼의 노래’를 빌려다 드렸어요. 저요? 일주일에 2, 3권씩은 읽죠. 요즘엔 신화 관련 책들이 재밌어요.”

‘책 은행, 독서 마일리지’로 관심을 모았던 경남 거제시 장목초교의 유준서 군은 그새 마일리지를 2만 송이(권당 50송이)나 모았다. 9월 18일 취재 당시에도 하루 3권 이상씩 읽어 ‘독서 부자’였던 준서는 12일 학생교육감 표창도 받았다. 6학년 김수빈 양은 도서관에서 읽은 파스퇴르 위인전 독후감으로 거제참꽃여성회 독후감대회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 개관 힘써 준 부모님께 감사 송년회

학부모들이 직접 망치와 톱을 들고 나서 만들었던 전남 해남 서정분교(10월 13일자)에서는 28일 소중한 행사가 열린다. 분교장이 1년간 학교마을도서관을 위해 힘써 준 학부모 전원을 초청해 감사의 송년회를 보낼 계획이다.

여전히 지도교사가 없어 자율 운영을 하지만 도서관이 내년엔 더욱 번듯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혜원이 아빠’ 황찬율 씨는 “겨울을 난 뒤 책도 늘리고 새봄맞이 인테리어도 다시 할 예정”이라며 “올해는 바빠서 책을 많이 못 봤는데 내년엔 열심히 읽겠다”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양로원과 마을회관 노인들에게 책을 읽어 주는 ‘꽃송이 활동’으로 훈훈함을 더했던 강원 강릉시 왕산초교 학교마을도서관(10월 8일자)에선 대대적인 책 읽기 운동이 한창이다. 면사무소나 보건진료소 등 인근 12군데 기관과 ‘밀어내기 책 읽기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도서관에서 빌려준 책을 기관 직원들이 돌려 읽는 운동. 벌써 4800여 권의 책을 빌려 읽었다.

9월 12일에 보도됐던 강원 원주시 ‘반계초교 아줌마 3총사’도 여전했다. 귀농주부 박은희(35) 씨는 그간 학교마을도서관에서 진행한 ‘평생 교육 학부모 독서교육’ 과정을 수강했다. 오후 7∼9시 격주로 진행된 수업에서 지역 명사나 문인을 초청해 효과적인 독서법을 배웠다. 수업에서 배운 자녀 독서교육법을 이용해 아이들을 위한 ‘메이킹 북’도 만들었다.

방앗간에서 일하는 정영희(41) 씨는 요즘 ‘추리소설 읽는 기름 아줌마’로 통한다. 바쁜 방앗간 일 중에도 책을 놓지 않는다는 게 보도된 뒤 주위에서 지어준 별명이다. 정 씨는 “책 조금 읽는 걸로 입에 오르내리는 게 부끄럽다”면서도 “아이들이 덩달아 책을 열심히 읽게 된 게 가장 큰 기쁨”이라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거창 ‘백일장 할머니’ 정무순 할머니의 그 후…

“자식 손자들이 너무 자랑스러워해

요즘 그림동화책 재미에 푹빠졌어”

얼마 전, 휴대전화에 낯선 번호가 찍혔습니다.

전화를 받으니 평소에는 잘 듣기 어려운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들려왔습니다.

“유성운 기자 선상님 전화 맞습니꺼?”

“네, 유성운입니다.”

“저, 정무순입니더. 기억나지요?”

순간, 9월 경남 거창군의 산골짜기에서 만난 정무순 할머니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경남 거창군 북상면 마을도서관 개관 기념 백일장에서 정 할머니는 칠순이 다 돼서 깨친 한글로 구순을 바라보는 노모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 특별상을 받았습니다(본보 9월 23일자 A1면).

9월 밤,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할머니와 대청마루에 앉아 사과를 깎아 먹으면서 ‘편지’에 얽힌 사연을 듣고, 늦게 시작한 한글 공부의 어려움에 대해 맞장구를 치며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수상식 직후 밭에서 한 아름 따서 지게에 지고 오셨던 사과는 무척 달았습니다.

“무신 책을 그리 많이 보냈습니꺼.”

할머니 특유의 무뚝뚝하지만 진한 반가움이 배어 있는 목소리였습니다.

기사가 나간 후 할머니는 온 마을의 ‘스타’가 되셨습니다. 여기저기서 알아보고 연락이 오는가 하면, 팬레터도 쇄도했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는 군민신문에서도 취재를 다녀갔습니다. 거창군 북상면 한글교실 교사 정주은(37) 씨의 말에 따르면 “얼마 전에는 비슷한 연령대의 할아버지에게서 팬레터가 와 수업시간에 읽어 주셨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태어나서 처음 받아 보는 팬레터에 답장을 어떻게 쓸지 몇 날 며칠을 고민하시다가 결국은 아직까지 보내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자식과 손자들이 신문에 난 할머니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고 합니다. 추석 연휴에 가족이 모였을 때도 화제는 단연 ‘동아일보에 난 할머니 기사’였습니다.

농사일에, 뇌수술을 받은 할아버지 간호에, 여전히 바쁘지만 할머니는 매주 2차례 한글교실에 참석하며 한글 공부에 열을 올리고 계십니다.

“보내 준 책 중에 짐승 나오는 것들은 글자도 시원시원하고 그림도 많아서 읽기에 좋습디더. 선상님이 보낸 책들 때문에라도 내가 공부 열심히 할라고요.”

“책 다 보시면 또 보내 드릴 테니까 연락하세요.”

“진짜요?” “네.”

“그라믄 이거 얼른 다 읽어야겠네. 아까워서 아껴 읽을라고 그랬지.”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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