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2007 정시 논술 특집]고려대학교 논술문제 유형

  • 입력 2006년 12월 26일 02시 57분


※ 다음 네 개의 제시문은 하나의 공통된 주제와 관련된 글이다. 그 주제를 말하고, 제시문 간의 연관 관계를 설명하시오. 그리고 그 주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논술하시오.(1800자 안팎, 150분)

[제시문 1]

호르헤는, 사부님이 펼쳐 들고 있는 서책 바로 옆의 서안을 치면서 말을 이었다.

“과거 수세기 동안 우리 신학의 박학들과 교부들은 신성한 가르침의 향기로운 요체를 은밀히 간직한 채로, 고결한 사상을 통하여 인간을 타락한 쾌락과 천박한 유혹으로부터 구제하려 했어요. 그런데, 풍자극이나 광대극과 싸잡아 희극을 평가하되, 불완전하고 허약한 인간의 연기를 통하여 감정을 씻어 내는 무슨 대단한 영약인 양 평가하는 이 서책은 오히려 천박한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사악한 식자로 하여금 악마적으로 뒤틀린 거만한 자들을 구하려 하고 있어요. 이것을 그대로 두면 이 서책이, 인간이 이 땅의 환락경만으로도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해괴한 사상을 고취시킬 우려가 있어요. 그대의 스승이라는 로저 베이컨이 자연의 경이가 곧 천국이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았듯이 말이오. 이것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도 없고 받아들여서도 안 되는 사상이오.”

“그대가 섬기는 아리스토텔레스도 이 서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엉터리 권위자인 그리스의 어느 철학자는, 까다로운 적도 웃음으로 조복(調伏)시킬 수 있으니, 웃음은 능히 까다로움을 조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소.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던가요? 그러나 우리의 진중하신 교부들은 달리 생각하셨으니, 웃음이 범부의 낙이라면, 이 범부의 낙은 마땅히 엄격한 규율 아래서 질책과 조정을 받아야 한다고들 하시었소. 범부들에게는 웃음을 제어할 무기가 없기 때문에, 이들을 영생으로 이끌고, 배와 엉덩이와 먹을 것과 더러운 욕망으로부터 이들을 구하자면 마땅히 목자들은 이를 엄격한 규율 아래에다 두어야 하는 것이오. 한데 미래에 누군가가 저 철학자의 말을 휘두름으로써 철학자인 양 뽐내며 웃음이라는 무기를 진짜 무기인 양 쳐드는 날, 설득의 수사학이 야유의 수사학이 되고, 구원의 상징에 대한 끈질긴 언어의 구조물이 되는 날 …… 이것 보아요. 월리엄 형제, 그대나 그대의 지식은 도매금으로 쓸려 나가고 마는 것이오.”

[제시문 2]

18세기는 앎을 규율화한 세기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앎을 내면적으로 조직하여, 스스로 자기 영역 안에 틀린 앎이나 또는 앎이 아닌 것을 도태시키는 기준을 마련하고, 내용을 동질화·규격화·등급화하여, 마지막으로 일종의 사실의 축 위에 그것을 집중시키는 규율로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앎을 규율로 정비하고, 이렇게 내적으로 규율화 된 앎들을 분산시켜 그것들 상호간의 소통·분배·등급화를 통해 일종의 통합 분야를 만드는 것, 이것이 소위 사람들이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과학은 18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학문·앎·철학이라는 것들이 있었을 뿐이다. 철학은 정확히 앎들 상호간의 조직체계, 또는 소통의 체계였다. 철학이 인식의 발전사에서 효과적·실질적·기능적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이 점에서이다. 그런데 이제 앎들의 규격화와 함께 그 다형적(多形的) 개체성 안에 현재 우리 문화의 몸체를 이루는 사실과 강제, 즉 사람들이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타났다. 바로 그 시기에, 그리고 이런 현상과 함께 철학의 창시적이며 정초적인 역할도 사라졌다. 이제부터 철학은 과학과 앎의 과정 내부에서 더는 아무런 효과적인 역할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상대적으로 모든 학문의 엄밀한 기초와 형식적 도구의 역할을 했던 보편 과학의 기획으로서의 보편 수학도 사라졌다. 이제는 일반 분야로서의 과학, 앎들의 규율적 경찰로서의 과학이 철학과 보편 수학의 대를 이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그것은 앎들의 규율적 경찰에 고유한 문제, 즉 분류의 문제, 등급의 문제, 근접성의 문제 등을 제기할 것이다.

앎들을 규율화하고, 학문의 내적 기능인 철학적 담론과 보편 수학의 내적 기획을 몰아내는 엄청난 변화를 통해 18세기는 이성의 진보라는 형식으로만 자의식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위 이성의 진보 밑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것이 다형적·이질적 앎들의 규율화였다는 것을 알아야만 우리는 뭔가를 이해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제시문 3]

기계들이 규격화, 소형화, 상품화됨으로써 지식의 획득, 분류, 배치, 활용 작용이 오늘날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잘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교통수단의 발전이 먼저 인간의 회전(운송)을, 그 후 소리와 영상의 회전(대중 전달 매체)을 가능하게 했듯이, 정보 기계의 증가가 회전을 촉진할 것이라는 생각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 따라서 ‘식자(sachant)’에 대한 지식의 강한 외재성, 인식 과정에서 지식인이 위치하는 어떤 지점을 예상할 수 있다. 지식 획득은 정신의 도야(Bildung, formation), 심지어 인격의 도야와 분리될 수 없다는 옛 원리는 더욱 효력을 상실할 것이다. 지식의 공급자 및 사용자가 지식에 대하여 갖는 관계는 상품의 생산자 및 소비자가 상품에 대해 갖는 관계와 같은 형태, 즉 가치 형태를 가질 것이다. 지식은 팔리기 위해 생산되며, 또한 새로운 생산에서 더 높은 가치를 부여받기 위해 소비된다. 이 두 경우에서 지식은 교환되기 위해 생산되고 소비되는 것이다. 지식은 자기 고유의 목적을 포기하고 ‘사용 가치’를 상실하고 있다.

… 지식이 생산력과 분리될 수 없는 정보 상품이란 형태를 띠면서, 지식은 이미 세계의 힘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쟁취물이 되고 있다. 국가들이 영토의 지배, 원자재와 저렴한 노동력의 사용과 착취를 위해 전쟁을 했듯이, 앞으로는 정보의 지배를 위해 서로 경쟁하리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산업적·상업적 전략과 군사적·정치적 전략을 위한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제시된 전망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지식의 상품화로 인해서 현대 국가가 지식의 생산과 보급에 관해 이미 보유했고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 특권이 침해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순환되는 메시지가 풍부한 정보로 이루어져 있고 해독하기 쉬울 때에만 사회가 존속하고 발전한다는 역원리가 강화됨에 따라서 지식이 국가, 즉 사회의 ‘두뇌’ 혹은 ‘정신’에 속한다는 생각은 구태의연한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지식의 상품화에 동반되는 의사소통적 ‘투명성’의 이데올로기에서 국가는 불투명성과 ‘소음’의 요인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경제적 권위와 국가적 권위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새로이 심각하게 제기될 소지가 있다.

[제시문 4]

도(道)란 본래 한계가 없고 말(言)이란 애초 일정한 의미 내용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도를 말로 표현하려고 하면) 구별이 생기게 된다. 그 구별에 대해 말해 보자. 사물에는 좌와 우가 있고, 말에는 대강(大綱)과 상세(詳細)가 있으며, 생각에는 분석(分析)과 유별(類別)이 있고, 다툼에는 앞다툼과 맞다툼이 있다. 이것을 여덟 가지 덕(즉 도에서 떠나 얻어진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 우주의 밖에 대해 성인은 그 존재를 부인하지 않지만 대강을 말하지도 않는다. 역대기(歷代記)의 치세책(治世策)이나 옛날 왕들의 기록에 대해 성인은 논의는 하되 (옳다 나쁘다 하고) 분별을 세우지 않는다. 그러니까 분석한다는 데에는 구별하지 못함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성인은 도를 그대로 자기 가슴속에 품어 버리지만, 일반 사람은 도에 구별을 둔 채 남에게 내보인다. 그러므로 구별을 한다 함은 (도에 대해) 보지 못하는 바가 있다(즉 깨닫지 못하는 데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穩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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