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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6년 12월 5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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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는 평범한 열여섯 살 소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프랑스 왕 샤를 7세의 겁쟁이 장수들을 설득해 전투에 나가게 했을 뿐더러, 그 자신은 물러설 줄 모르는 장수였다. 어떻게 잔 다르크는 이토록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을까?
폭력과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인간은 없다. 하지만 목숨을 던져서라도 지키고 싶은 이상이 있을 때 사람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잔 다르크의 능력은 조국을 구하라는 신의 명령에 대한 확신에서 나왔다. 이는 아무리 겁나고 힘들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야 할 신의 소명이었다.
순교자나 혁명가들도 마찬가지다. 이네들은 ‘역사의 올곧은 방향’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 예컨대, 지하드에 나서는 이슬람 전사들은 신이 뜻하신 역사 방향에 따라 목숨을 던질 때 자기 삶의 의미가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조선의 선비들은 효(孝)와 충(忠)이 바로 선 이상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목에 칼날이 들어와도 겁내지 않았다. 그럴 때에야 자신은 짧고 덧없는 인생에서 벗어나, 더 고귀하고 영원한 가치와 하나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와 사회에 과연 ‘바람직한 방향’이 있을까? 독재자들은 흔히 벅찬 이상을 호소해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한다. 이집트를 침략한 나폴레옹은 피라미드 앞에서 병사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5000년 역사가 그대들을 굽어보고 있다!” 그러나 거개가 농촌의 순박한 젊은이들이었던 병사들은 대부분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나폴레옹의 전쟁은 결국 강한 나라의 침략 전쟁이었을 따름이다. 그네들의 죽음이 과연 5000년 역사와 버금갈 정도로 가치 있었을까?
히틀러는 ‘위대한 게르만족의 국가 건설’을 내세워 젊은이들이 기꺼이 총을 잡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네들의 죽음은 결국 무엇이었을까? 동아시아 모든 나라들이 형제처럼 하나가 되자는 ‘대동아공영권’이란 환상을 위해 쓰러진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은 또 어떤가?
그래서 사학자 슈펭글러는 역사란 “무의미의 바다 속에서 조개를 줍고자 하는 마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삶을 뛰어넘어 추구해야 할 절대적인 이상이나 가치란 있을 리 없다. 언젠가 덧없이 끝나고 말 우리네 삶은 언제나 마음을 헛헛하게 한다. 그래서 인간은 영원한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 내고 이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에드워드 기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는 인류의 범죄, 어리석은 행동, 행운의 기록장에 지나지 않는다”고까지 말한다. 과연 역사는 그 자체로는 아무 가치도 없는 사실의 연속에 지나지 않을까?
역사란 결코 시간의 흐름만은 아니다. 예컨대, 철학자 헤겔은 역사를 ‘자유의 확대 과정’이라고 평가한다. 과거에는 왕과 귀족들만 자유를 누렸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인’이 되어간다는 뜻이다. 확실히 사회가 발전할수록 인권에 대한 믿음은 점점 더 넓어지고 강해진다. 경제적인 부와 기술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같이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과거에도 발전은 꾸준히 이루어졌다. 석기에서 청동기로, 청동기에서 철기 문화로 나아가는 인류의 기나긴 과정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삶을 걸 만한 ‘역사의 바람직한 발전 방향’이란 실제로 있을까?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새를 어르고 달래서 울게 만들었던’ 사람으로 평가 받는다. 반면, 그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새가 울 때까지 줄곧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단다. 도요토미가 자신이 생각한 역사의 방향을 이루려 안달했다면, 이에야스는 상황이 자신의 능력에 맞게 만들어질 때까지 참으며 기다렸다.
그런가 하면, 어려운 시대 속에서도 역사 전개와는 상관없이 자기만의 편안하고 즐거운 삶을 좇아 살다간 사람들도 많다. 사회가 안정될수록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이럴수록 자살자와 우울증 환자가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의 방향과 의미에 대해 곱씹어 보아야 할 때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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