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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6년 11월 28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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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2004년 요미우리 소설상을 수상한 일본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주인공인 수학박사는 교통사고로 기억이 80분밖에 지속되지 못하지만 모든 사물과 현상을 수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예를 들어 가정부의 전화번호가 576-1455라고 하면 박사는 1에서 1억 사이에 존재하는 소수의 개수가 5761455개이기 때문에 의미 있는 전화번호라고 답한다. 또 신발 사이즈 24는 4의 계승(4×3×2×1)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가정부의 생일이 2월 20일이라고 하자 220과 자신의 시계에 새겨진 284는 특별한 관계라고 말한다. 220의 진약수(자기 자신을 제외한 약수)를 모두 더하면 284가 되고, 역으로 284의 진약수의 합은 220이 되어 220과 284는 친화수(amicable number)이기 때문이다.
수학박사는 야구장의 좌석번호 7-14, 7-15로부터 루스-아론 쌍(Ruth Aron pair)을 떠올린다. 전설적인 야구 선수 베이브 루스와 행크 아론에서 비롯된 루스-아론 쌍은 714와 715와 같이 소인수의 합이 같은 연속된 두 수를 말한다. 714는 2×3×7×17이고 715는 5×11×13이며, 714와 715의 소인수의 합은 2+3+7+17=29=5+11+13으로 서로 같아진다. 루스는 1935년 홈런 714개로 기록을 세웠으며, 이는 1974년 아론이 715호 홈런을 날림으로써 깨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붙여진 용어이다. 이처럼 수학박사에게 수는 자신과 세계를 연결해 주는 입구이자 소통 창구이다.
영화 제목이 의미하는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일명 ‘오일러의 공식’이라고 불리는 을 말한다. 소설에서 이 수식을 묘사하는 대목은 ‘하늘에서 π가 e곁으로 내려와 수줍음 많은 i와 악수를 한다. 그들은 서로 몸을 마주 기대고 숨죽이고 있는데, 한 인간이 1을 더하는 순간 세계가 전환된다. 모든 것이 0으로 규합된다’와 같이 지나치게 서정적인 측면에서 묘사한 경향이 없지 않다. 하지만 자연로그의 밑 e, 원주율 π, 허수 i와 가장 기본적인 수 0과 1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만들어낸 간결한 식 이 아름다운 수학 공식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보면 수의 세계에 몰입하여 세상만사를 수와 연관짓고 신비화하는 수비주의(數秘主義) 경향이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경향을 읽을 수 있는 또 다른 영화가 1998년 제작된 ‘파이(π)’이다.
‘파이(π)’의 주인공 맥스 코헨은 수학을 통해 우주 만물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수학자이다. 맥스는 ‘유클리드’라는 이름의 개인용 컴퓨터로 주식시장의 수학적 패턴을 알아내고자 한다. 어느 날 맥스의 컴퓨터는 216자리 수를 출력하고는 다운되어 버리는데, 주식시장을 예측할 수 있는 이 수를 알아내려는 여러 세력들이 맥스를 노린다. 결국 맥스는 216자리 숫자가 기억되어 있는 자신의 뇌를 드릴로 파괴해 버리는 자해 행위를 한다.
이 영화에는 피보나치수열, 황금비, 아르키메데스 나선, 프랙털 등 수학적 개념들이 등장하지만 원주율 파이가 직접 다뤄지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영화 제목 ‘파이’가 다소 무색하지만, 원주율 파이는 신비로운 수의 세계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개념이라는 점에서 수학을 다루는 영화의 제목으로 적절하다.
‘큐브’는 17576(26×26×26)개의 정육면체(cube) 방들이 연결된 입체 살인 미로를 탈출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공포영화로 상당 수준의 수학적 원리가 들어 있다. 방에 갇힌 여섯 명의 사람들은 일련의 단서를 통해 어떤 방에 트랩이 있고 없는지를 탐색해 가는데, 결국 방 입구에 적힌 세 수 모두 소수(素數)가 아니라 합성수여야 트랩이 없다는 것을 알아낸다. 또한 각 방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위치를 바꾸는데 방의 치환 과정에서 현대 대수학의 군론(group theory)이 이용된다.
세 편의 영화에서 살펴보았듯이 수학은 영화의 내용을 이끄는 소재를 제공한다. 이처럼 수학은 영화의 직접적인 소재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간접적인 측면에서도 기여를 한다.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이 복잡하게 얽힌 복선을 정교하게 구조화하며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수학을 통해 길러진 사고력이 일조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영원히 만나지 않을 평행선처럼 보이는 수학과 영화 사이에도 교점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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