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자가족 인권침해 사례]“동생 납북됐다고 빨갱이 몰려”

  • 입력 2005년 6월 6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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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납북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기로 함에 따라 그동안 ‘빨갱이’로 몰려 평생을 숨죽이며 살았던 납북자 가족들의 응어리가 어느 정도 풀릴 전망이다.

그러나 정보기관의 감시 및 고문, 취업 제한 등 납북자 가족들이 주장하는 각종 인권침해 사례가 대부분 30∼40년 전 저질러진 일로 입증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데다 정부의 관련문서 보존기간(5년)도 거의 모두 지난 상태여서 피해 실태가 얼마나 규명될지는 미지수다. ▽인권침해 실태=19세이던 1961년 연평도에 조기를 잡으러 갔다가 납북됐다 열흘 뒤 돌아왔던 이모(63) 씨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조사도 받지 않은 채 훈방됐다.

그러나 6년 뒤 동생(당시 17세)이 다시 어로작업 중 납북됐고 이때부터 정보당국의 핍박과 감시가 시작됐다. 3개월에 한 번씩 누구를 만나 무슨 활동을 했는지 써내야 했고 1968년엔 “동생과 접선하지 않았느냐”며 물고문 등을 당한 끝에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2년의 옥살이를 해야 했다.

1970년 출소했지만 고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현역 입영도 허용되지 않아 방위로 복무했다. 제대 뒤엔 마음대로 취업할 수도 없어 평생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 씨는 “가족의 납북 사실이 결혼에도 영향을 미쳐 당시로선 늦은 나이인 31세에야 결혼할 수 있었다”며 “아버지는 억울한 일을 계속 당하다 화병으로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1975년 강원 주문진에서 어로작업을 하던 남편이 납북된 양모(65) 씨는 지금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고 했다.

양 씨는 남편 최모(당시 36세) 씨가 납북된 뒤 경찰서 형사들이 계속 조사와 감시를 하는 바람에 그동안 8번이나 이사를 해야 했다.

양 씨는 “식모살이를 하면서 애들을 키웠다”며 “납북자 가족이라며 아들을 군대에서 받아주지 않은 것도 한이 된다”고 말했다.

▽미온적으로 일관한 정부 대응=납북자 가족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을 가눌 수 없는 상황에서 ‘연좌제’로 인한 감시와 고문, 사회적 냉대와 멸시 등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민주화가 이뤄진 1990년대 이후에도 정부의 대응은 미온적이었다.

16대 국회 땐 납북자 관련 법안이 상정되기도 했지만 결국 햇빛을 보지 못했으며, 노무현(盧武鉉) 정부도 지난해 4월 국가인권위원회가 ‘특별법 제정을 통한 명예회복과 보상’을 권고했지만 1년이 넘도록 미뤄오다 이제야 결론을 내렸다.

하종대 기자 orionha@donga.com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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