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에 질려 당했을 뿐인데 저항 안해 강간 아니라니”

  • 입력 2005년 2월 25일 18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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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죄의 성립을 둘러싸고 법원의 판결이 엇갈려 논란이 일고 있다. 형법 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때’ 강간죄가 성립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폭행 또는 협박의 의미에 대해 대법원은 그동안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여야 한다’고 해석해 왔다. 그러나 일부 판결은 강간죄의 구성 요건인 폭행과 협박의 의미를 여성의 처지에서 이해해 강간죄 성립을 폭넓게 인정하는 등 다소의 변화 조짐을 보여 주고 있다.》

▽완고한 가해자 중심 판례=법원은 가해 남성의 모습이나 행동에 여성이 겁을 먹고 마지못해 성행위에 응한 경우에는 강간죄 성립을 부정해 왔다.

서울고법 형사5부는 15일 인터넷 채팅으로 알게 된 한모 양(당시 13세)을 성폭행한 혐의로 1심에서 강간치상죄가 인정됐던 배모 씨(32)의 강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고 대신 폭행치상죄를 적용해 형량을 낮췄다.

범행 당시 배 씨가 피해자의 어깨를 누른 정도로는 ‘항거 불능’ 상태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판결 이유. 배씨는 1심에서 강간치상죄가 적용돼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됐으나 항소심에서는 폭행치상죄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광주고법 형사1부는 지난해 9월 인터넷을 통해 만난 이모 양(16)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강간치상죄로 징역 2년 6개월이 선고된 유모 씨(21)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역시 ‘항거 불능의 폭행이나 협박이 없었다’는 이유였다.

▽판례 변화 시도=대법원은 지난해 8월 강간죄 구성 요건인 폭행과 협박의 의미를 이전과는 다르게 해석하는 판결을 내렸다.

한국 근무를 위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한 미 여군(당시 20세)을 부대까지 태워주겠다며 호텔로 데려가 성관계를 한 택시운전사 임모 씨(49)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유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낸 것.

대법원은 당시 판결에서 “피해자를 항거불능 상태에 놓이게 했는지 여부는 폭행 및 협박의 내용과 정도는 물론이고 심리적 영향, 피해자와의 관계 등 제반 사정을 종합해 판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가해자가 직접적인 폭력이나 위협을 가하지 않았지만 피해 여성이 저항할 경우 더 큰 피해가 있을 것임을 우려해 저항을 포기했다고 해도 항거불능 상태라고 인정한 것이다.

이 판결 이후인 지난해 10월 서울 북부지법 형사11부는 훨씬 더 획기적인 판결을 내렸다. ‘때릴 듯이 겁을 준 뒤’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임모 씨(29)에 대해 강간죄를 적용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강한 폭행이나 협박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경우 강간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견해는 피해여성의 내면적 심리와 공포를 도외시한 것”이라며 “이런 견해는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정서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봉건시대의 잔상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들 판결을 제외한 대부분의 판결은 여전히 기존의 엄격한 판례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서울대 법대 조국(曺國) 교수는 “강간죄와 관련해 폭행, 협박의 개념을 극도로 좁게 해석하는 나라는 일본과 한국 정도”라며 “피해 여성에 대한 의심과 편견이 판례 변화를 가로막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李美京) 소장은 “지난해 대법원 판례 변화 직후 일부 용기 있는 판결이 나와 법원이나 수사기관이 달라질 것으로 기대했는데 여전히 과거 남성 중심적, 봉건적인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수형 기자 sooh@donga.com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외국의 경우▼

미국과 영국뿐 아니라 독일, 프랑스 등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상대방의 동의가 없을 경우 어느 정도의 폭행이나 협박만 있어도 강간죄를 인정한다.

미국의 경우 1960년대 강간죄 관련 법 개혁 운동이 벌어지면서 기존 강간죄 구성 요건 중 ‘강력한 저항’이라는 개념 자체가 삭제됐다.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는 성관계’는 폭행이나 협박의 정도에 관계없이 강간죄로 인정한다.

영국도 오래 전 강간죄의 정의에서 ‘피해자의 저항’이라는 요건을 삭제했다. ‘상대방의 동의 없이 성행위를 하면 강간’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독일은 1990년대 중반 법 개정을 통해 폭행과 협박의 수위를 구별해 처벌하고 있다.

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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