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55년 ‘엽색행각’ 박인수 검거

  • 입력 2004년 5월 30일 18시 47분


“그들과 결코 결혼을 약속한 적이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댄스홀에서 함께 춤을 춘 뒤에는 으레 여관으로 가는 것이 상식이었다….”

‘한국판 카사노바’ 박인수.

혼인빙자간음 혐의로 법정에 선 그는 ‘혼인빙자’를 강력히 부인했다.

대학 재학 중 입대한 이 훤칠한 미남은 해병대 헌병으로 있으면서 사교춤을 익혔다. 해군장교구락부, 국일관, 낙원장 등 고급 댄스홀을 드나들었다.

1954년 제대 후에도 해군대위를 사칭하며 화려한 여성편력을 이어간다.

1년 남짓한 동안 70여명의 여성을 상대했는데 대부분이 명문대에 다니는 여대생이었다. 그중에는 국회의원과 고위공무원의 딸도 있었다.

“나와 교제한 수많은 여성 중 처녀는 미용사인 이모양뿐이었다.”

‘순결의 확률’ 70분의 1은 당시 인구에 회자된다. 그것은 1950년대 전후(戰後) 한국사회의 성 모럴을 재는 바로미터이기도 했다.

1심 재판부(재판장 권순영 부장판사)는 혼인빙자간음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다. 현역장교를 사칭한 부분에 대해서만 2만환의 벌금형이 내려졌다.

재판이 끝난 뒤 권 판사는 명언을 남겼다. “정숙한 여인의 순결한 정조만이 보호받을 가치가 있다!”

1955년 5월 그가 검거될 때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박인수 스캔들’은 무죄선고로 또다시 들끓는다.

남녀관계에서 ‘가해자는 항상 남자요, 피해자는 여성’이라는 천년내의 공식이 깨진 것이다. 여성의 순결과 정조에 관해 도덕의 색안경을 벗은 현대적(?) 판결이 내려진 거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박인수는 징역1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된다.

“댄스홀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 내놓은 정조는 아니다”는 논지였으나 군색했다. 여론은 이 죄 없는(?) 바람둥이에게 관대할 수 없었으니. 정작 법이 보호하고자 했던 것은 ‘여성의 정조’로 상징되는 남성 지배의 이데올로기는 아니었을까.

박인수의 엽색행각은 군 복무시절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약혼녀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일찍이 카사노바는 호색한들을 위해 그럴듯한 변명을 지어냈다.

“나는 여성을 사랑한다. 그러나 내가 진정 사랑한 것은 자유였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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