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 칼럼]교육부 욕심 지나치다

  • 입력 2004년 5월 28일 18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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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하고 있는 ‘EBS 수능강의’에 개인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다. 나라에서 고교생을 상대로 직접 과외를 하고 있으니 우선 정부가 할 일이 아니다. 교사들은 사명감과 보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EBS 수능강의는 교사 전체를 불신하는 것이므로 학교교육에 해가 될 수밖에 없다.

EBS 수능강의가 시작된 이후 두 달이 지나면서 사교육비 경감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보도다. 비정상인 줄 알면서도 나라 전체가 어쩔 수 없이 용인하는 꼴이다. 그렇더라도 지켜야 할 원칙은 있다. 학원과 개인과외에 의존해온 학생들에게 EBS 수능과외라는 대안을 제공하는 선에 그치는 것이다. 내친 김에 사교육을 잡겠다고 욕심을 부린다면 교육을 망칠 수 있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EBS 수능강의’의 한계▼

EBS 수능강의를 시작하면서 교육부는 귀에 솔깃할 만한 단서를 달았다. EBS 강의가 11월 실시되는 실제 수능시험과 연계될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연계’라는 우회적인 표현을 썼지만 수험생들은 EBS 강의교재 안에서 수능시험이 출제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고, 교육부도 그렇게 받아들여주기를 원했을 것이다.

수능시험을 출제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이에 대해 “학교 수업과 EBS 강의를 적절하게 공부한 학생이 실제 수능에서 좋은 점수를 받게 될 것”이라는 말로 화답했다. 명확한 언급은 없었지만 수험생과 교육부, 평가원 3개 수능시험 주체들이 야구선수처럼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사인을 주고받은 것이다.

EBS 교재에서 수능시험 문제가 나와야만 수험생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고, 그래야 사교육비 절감 효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을지 모르지만 이것만으로도 정부가 공적기관으로서 체통을 포기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수능시험을 앞두면 유행하는 게 ‘찍기’ 과외다. 과외선생이 수능시험에 어떤 문제가 나올 것이라며 미리 알려주는 것이다. 정부의 ‘연계’ 방침이 수험생과 밀약을 나누며 ‘찍기’를 해주는 것과 얼마나 차이가 있을지 의문이다.

그것도 성에 안 찼는지 며칠 전 교육부는 교재뿐 아니라 EBS 강의 내용에서도 수능시험이 출제된다고 발표했다. EBS 강의를 시청하면 수능시험에 나올 문제를 미리 알 수 있다는 말로 들리기 십상이다. 솔직한 심정을 말한다면 어떻게 뒷감당을 하려고 그런 말을 하는지 놀라울 뿐이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도모한다는 교육부가 눈앞의 ‘사교육 잡기’에 매몰되어 이렇게까지 나올 수 있느냐는 문제는 접어두더라도 현실적으로 심각한 부작용이 기다리고 있다. EBS 수능강의는 그 분량이 엄청나다. 수능 과목은 크게 다섯 가지이지만 그 안에서 다시 여러 세부과목으로 나눠지고 수준별 학습이라고 해서 고급 중급 초급이 각각 따로 있다.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녹초가 되어 돌아온 수험생들이 언제 그 많은 강의를 다 듣는다는 말인가. 사교육을 줄이는 게 아니라 더더욱 학생들을 학습부담의 수렁 속으로 몰아넣는 결과다.

▼시험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더 걱정스러운 것은 실제 수능시험을 치른 다음이다. 수능시험에 EBS 강의 내용이 많이 나와도, 혹은 적게 나와도 모두 문제가 된다. 많이 나올 경우 정부가 시험문제를 가르쳐 줬다는 비판과 함께 이런 시험을 왜 치르느냐는 무용론이 제기될 것이고, 적게 나오면 EBS에서 출제하겠다는 약속을 어겼다는 항의가 나올 것이다. 어느 쪽이든 교육정책의 신뢰성이 타격을 받게 되어 있다.

정부가 언제까지 EBS 강의를 계속할지 알 수 없지만 지금부터라도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 구태여 EBS 강의가 수능시험에 나온다고 말을 안 해도 실제 시험을 잘 보는 데 도움이 되면 수험생들은 내년에도 EBS 강의를 시청할 것이다. EBS 강의는 일반 학원을 능가하는 양질의 강의를 제공해 사교육의 물길을 돌리는 역할에 만족해야지, 더 이상은 유혹이 생기더라도 참아야 한다. 교육당국은 본분을 냉정히 생각해 보라.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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