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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2월 20일 16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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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주 어릴 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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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버리고 나면’이란 이 시를 쓴 주인공은 서울시 건설행정과 노점정비팀장 김일기(52·사진)씨.

그는 지난해 11월말 간암 판정을 받았다. 청계천복원공사의 주요과제였던 노점상 정비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업무에 열중하던 중이었다.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청계천 노점정비는 마무리됐습니다”란 마지막 상황보고서를 서울시장에게 제출한 뒤 칩거에 들어갔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홀로서기로 서울시 공무원이 된지 25년. 그는 일 잘하고 멋을 아는 공무원으로 동료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암 판정을 받는 순간, 그는 세상과 소통하기를 포기하고 집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가족들은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에 빠졌다. 그런 가족의 모습을 지켜봐야하는 그의 고통 또한 더욱 커져만 갔고 병세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절망과 고통의 늪.
그 속에서 김일기씨를 빼내준 것은 다름 아닌 ‘시’ 였다.
“시를 쓰며 마음을 달래봐라.”
20년 지기인 공원녹지관리사업소 송명호(54)팀장은 자신을 집으로 불러 괴로운 심정을 토로하는 친구에게 “집안에 숨어만 있지 말고 세상에 하고 싶은 얘기나 실컷 하라”며 시를 쓸 것을 권유했다.
김일기씨는 88년 문예지를 통해 정식으로 데뷔한 시인. 빡빡한 공직생활 틈틈이 문인협회와 국제 펜클럽에서 활동 했던 그는 친구의 권유를 받아들여 그날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친구 송씨는 김씨가 쓴 투병 시와 투병편지를 모아 홈페이지(http://myhome.nate.com/kimilki/)를 꾸며 선물했다. 지난 5일 문을 연 홈페이지의 제목은 ‘친구야 보고 싶다’.
읽는 이이게 진한 감동을 전해주는 ‘투병창가에서’ 코너가 기장 눈에 띈다. 투병생활의 고통과 삶에 대한 의지 등을 담은 창작 시와 군대간 둘째 아들 등 가까운 사람들에게 띄운 편지글들을 모아놓은 코너다.
이 코너에 제일 먼저 올려진 시 '다짐'은 이렇게 적고 있다.
투병앓는 소리 내지 않으리 |
이 홈 페이지는 소리 소문 없이 네티즌들에게 알려졌다. 방문객수도 날이 갈수록 조금씩 늘어 20일 현재 5300여명이나 다녀갔다.
친구 송씨는 “일기가 글을 쓰고 방명록에 남겨진 네티즌들의 격려 글을 읽으며 병세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고 친구의 근황을 전했다.
박해식 동아닷컴기자 pistol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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