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씨가 보낸 이메일 전문

  • 입력 2003년 12월 15일 18시 46분


코멘트
세 번째 그 자리에 서게 되면서.........

정치개혁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의 핵심은 “깨끗한 정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국민에게 신뢰받는 정치로 거듭 태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선출직 공직에 입후보하는 자는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각오로 나서야 합니다. 그 봉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지혜와 인생을 국민에게 바치는 과정이 정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존경받는 리더들을 통해 안정과 번영의 길로 나가야 합니다. 더 이상 대통령 뽑아 놓은지 1년이 넘도록 ‘대통령을 인정 하네, 못 하네’ 하는 식의 싸움으로 국정을 발목잡는 일이 반복 되서는 안 됩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의 가정통신 기록부에 아빠 직업을 정치인이라고 당당히 적지 못하는 일은 이제 없어야 합니다. 물론 정치가 자선사업이 아닌 이상 자신의 재산까지 다 털어서 바쳐야 하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정치가가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지혜를 국민과 역사 앞에 바치는 행위를 통해 국민은 정치가에게 국가권력을 맡기고 그들에게 사회적 존경을 보내주어야 하고 그가 그 일을 잘 볼 수 있도록 민주주의 유지비용을 지출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으로 시작하는 선출직 공직자가 국민으로부터 선택을 받기위해 노력하는 그 과정에는 선거와 일상적 정치활동이라는 적지 않는 비용이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이런 비용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사회는 이 비용에 대해 지금 심각한 불신에 빠져 있습니다. 이 심각한 불신의 원인은 분명합니다. 바로 정치가 불신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가 국민에게 신뢰를 받는다면 국민은 정치 비용을 더 내더라도 일을 잘하라고 어깨를 토닥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 대다수는 정치를, ! 정치인을 불신합니다.

정치가 국민 모두의 이익보다는, 권력욕에 불타는 일부 힘센 정치인들과, 또 이들과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소수 기득권 세력의 이익에만 봉사해온 불행한 우리의 역사 때문입니다.

그들만의 잔치, 그들만의 출세와 부귀 영화를 위해 정치가 존재한다고 사람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의 말을 신뢰하지 않고 존경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출세하려고 발버둥치는데 먹고 살기 힘든 내가 왜 시간을 쓰고 관심을 갖고 돈을 보내고 존경을 보내야 하는지 국민들은 동의하기 어려워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은 정치 비용을 짜게 책정하고 비현실적으로 책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정치인들이 돈 있는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게 만들고 불법적인 정치자금의 유혹을 늘 갖게 합니다. 모든 정치인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어 놓은 셈입니다.

예를 들어 각 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시에 입후보자들은 경선 참가 비용을 내야 했습니다. 지난번 우리 민주당의 입후보자들은 2억 5천만원을 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국회의원이 연간 합법적 후원금품 모금 한도액은 3억원에 불과합니다. 형식논리로만 따지자면 2억 5천을 내고 남은 5천만원의 후원금품 모집 잔액을 갖고 전국을 돌며 후보경선 선거운동을 하라는 것인데, 사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16개 광역 시도별로 지지자들이 선거운동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돈으로 매표 행위를 하지 않아도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여야 하는 일이기에 적지 않은 비용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현행 법, 국민 여러분들이 동의해주는 정치자금법의 실정은 이것을 모두 선의의 지지자들이 자기 돈 써가며 움직이던지 입후보자 개인이 부자여서 자기 돈으로 충분히 치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정치는 지금 불신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걱정하는 것은 이 불신속에서 정직하고 깨끗한 사람이 살아남을 것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정치가 불신받아온 이유는 고비용 정치, 귀족적인 정치, 국민의 지지보다는 돈과 무력으로 권력을 빼앗아 왔던 우리 정치사의 어두운 역사가 이런 정치 불신의 역사를 강화시켰습니다.

과거 군사정권은 국민의 민주적 지지보다는 돈과 조직으로 표를 장악해왔습니다. 왜 정치를 하려는지 동기가 불분명한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특정지위를 획득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정치를 통해 권력과 금력을 얻으려 하고 그래서 돈으로 사람을 사고 표를 얻어 권력을 획득해 왔습니다.

무조건 이기면 된다는 마음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20억원을 썼느니 30억원을 썼느니 50억원을 썼느니 하는 말들이 난무합니다. 그러니 정치하는 일이 국민에 대한 봉사정신의 발로요 국민에게 존경받는 일이 되기보다는 입신출세를 위해 눈 먼 자들의 험난한 잔치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정치 불신의 시대속에서 정치권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모두에게는 엄청난 고통이고 스트레스입니다.

제 동족을 총칼로 죽이고 민주주의라는 헌법적 질서를 유린하며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정권에 무한한 증오를 품으며 저는 저의 짧은 고교 생활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빽없고 소외된 사람들의 가난과 비통한 생활상을 보면서 제 개인의 입신출세보다는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젊은 날을 온통 사회변혁이란 단어만 되뇌이며 살아왔습니다.

이 세상을 갈아엎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 가난하고 빽없는 자들을 위해 나라를 새롭게 세우자고 했던 20세기의 모든 변혁운동들이 실패로 끝나는 현실을 보면서 저는 깊이 좌절했습니다. 사회주의 정권도 실패했고 제3세계 나라들의 식민지 민족해방투쟁도 결국 국민의 행복한 생활과 국가의 번영을 확보하는데 실패하는 역사 현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우리 모두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두 가지 체제를 현실 가능한 유일한 대안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좀더 좋은 사람들이 좀더 도덕적인 사람들이 좀더 개인의 이익보다는 이웃과 서민의 아픔을 좀더 이해하고 봉사할 줄 아는 자들이 정권을 책임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역사적 책임감으로 정치권에 들어와 지금 집권세력의 측근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제 허명이 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부심은 저 혼자만의 것일 뿐 국민들이 신뢰를 보내주지는 않으십니다. 저 역시 저를 정치권의 그렇고 그런 꾼으로 밖에는 보지 않는 많은 분들의 의혹에 찬 시선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저 또한 정치 엘리트화되어, 고통받고 빽없고 가난한 서민과 국민의 눈으로 볼 때 부패하고 타락해 보일 것이란 점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지난 IMF 시절 많은 분들이 실업자가 되어 거리를 헤매고 명동집회에서 어느 실직자 아내의 눈물어린 편지 낭독이 있었을 때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치권에 있는 나는 이 IMF라는 폭풍 속에 너무 안일하게 숨어있는 것은 아닌지...

마치 전선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싸우다 죽을 때 육군본부 막사에서 펜대를 굴리는 자의 나태와 안일함이 나에게 스며들어있는 것은 아닌지 몇 일을 고민했습니다.

현실 정치와 선거라는 그 진흙탕 싸움 속을 헤치고 나왔으니 어찌 제 바짓가랭이에도 진흙이 묻어있지 않겠습니까. 제 바짓가랭이에 묻어있는 진흙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자위하거나 합리화하지는 않겠습니다.

오히려 국민들이 우리에게 기대했을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생각하면 마음이 더욱 무겁고 가슴 아픕니다.

이런 난감한 자기반성속에 성품 깨끗한 분들은 모두가 다 정치를 멀리하려 합니다.

우리와 함께 해왔던 이호철씨는 선거때면 노무현이라는 역사적 대의를 버리지 못해 선거에 참여해서 운동을 돕지만 선거만 끝나면 도망갑니다.

정치가 다양한 계급과 계층을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끌어당겨야 하는 일이다보니 부자들을 만나면 부자들의 문화에 맞추어야 하고 지역에 가면 지역의 정서에 익숙해 져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한 입에 짜장면 먹다 짬뽕 먹어야 하는 혼란을 피할 수 없고 이 피할 수 없는 혼란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 이호철씨는 선거만 끝나면 정치권을 도망갑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자기반성과 성찰을 갖는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하며 그냥 자신만 지키면 끝나는 일일까요. 아니면 현실 정치판에서 무기력한 원칙만 지키며 의미조차 찾을 길 없는 아름다운 패자로 사람들에게 역사와 사회에 대한 낙담만 키워야 할까요. 그래서 이기는 놈이 장땡이라는 믿음을 확인시켜주어야 할까요.

대통령은 한때 저에게 정치를 하지 말라고 만류 하셨습니다. 스스로 원칙을 지키며 해온 정치이지만 도덕적 권위와 명예를 국민으로부터 얻기 힘든 현실 정치판에서 나 어린 자신의 측근이 또 출발하는 것이 너무도 안쓰러웠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몇 달을 고민했습니다. 어찌해야 하나. 제 자신이 정치인으로서 어디까지 역사와 국민에게 기여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초선이 재선되고 그러다가 당 지도부에 도전하고 그래서 다시 국가 경영에 도전하는 이 험난한 과정을 통해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국민의 지지와 존경, 사랑. 역사에 기여한 자로서의 자부심...그러나 우리의 정치 현실속에서 이런 것이 과연 가능한가.

노무현 대통령이 인권변호사에서 초선의원으로, 그리고 오늘날 대통령의 자리에 계시기까지 그 전 과정을 듣고 보아온 저로서도 정치인 노무현의 오늘은 솔직히 매력적인 미래가 아니었습니다.

시대의 소명의식, 역사와 국민을 향한 한없는 사랑과 의무로서 하는 정치여야 겠으나 이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그 과정에서 내 개인과 내 가정의 행복은 무엇인가.

하느님 아버지를 외치는 수많은 목회자들의 갈등처럼... 나약한 한 인간의 의지만으로 넘기 힘든 사회 현실이 존재하고 밀림의 숲과 같은 사회적 장애가 존재하는데.... 나는 이 길을 갈 자신이 있는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라는 논쟁처럼 국민의 불신이 먼저냐 정치인의 타락이 먼저냐는 사실 따지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출발은 명백합니다. 정치인, 정치 자체가 국민으로부터 신뢰받을 만한, 이쁘게 보일 만한 도덕적 권위를 확보하는 일이 문제해결의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도덕적 권위의 확보는 솔직한 반성이 선행되어야 성립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도덕적 권위의 확보는 정치가 특권적 직업이 아닌 무거운 봉사의 의무를 지는 일임을 실천적으로 보여줌으로서 성립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성과 실천만이 이 불신의 시대를 극복하는 길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반성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당에 가서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하면 되는 일인가. 검찰에 나가 내 바지에 묻은 진흙이 무엇인지 다 떼어서 조사해 달라고 해야하는 걸가. 산사에 찾아가 도량 수행을 해야 하는 일인가.빈민촌에 들어가 봉사활동을 해야 하는 일인가...

어떻게 새로운 출발을 선언해야 하는가. 지금 저는 제 인생의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갈림길에서 예전의 길로 갈지 새 길로 갈지, 그냥 이대로 이 갈림길에서 서성여야 할지...... 멍하니 서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래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업그레이드되는 것이 또렷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안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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