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정경준/겉도는 ‘損賠가압류’ 노사정 회의

  • 입력 2003년 11월 28일 18시 06분


툭하면 불법파업을 일삼는 노동조합과 ‘본때’를 보이기 위해 손해배상 청구와 가압류 신청으로 대응해온 사용자, 그리고 정부가 한자리에 모였다.

27일 처음 열린 ‘손배 가압류 제도개선위원회’는 최근 노조 간부들의 잇단 분신과 자살로 노동현안이 된 손해배상과 가압류 문제를 풀어 보자며 노 사 정 대표들이 머리를 맞댄 자리였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성사된 모임이었지만 회의는 ‘예상대로’ 싱겁게 끝났다.

노동계 대표로 나온 김성태(金聖泰) 한국노총 사무총장은 “손배와 가압류는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노조활동을 위축시킨다”며 “새로운 노사관계의 틀을 구축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1400여억원의 손배와 가압류를 먼저 털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경영계 대표인 조남홍(趙南弘)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은 “손배와 가압류를 털어내기도 어렵지만 한다 해도 노조가 또 불법파업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 노동계의 주장대로 쟁의행위의 정당성 인정 범위를 확대하면 파업만 남발된다”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양측의 추천으로 회의에 참석한 2명의 변호사도 “손배와 가압류 남발이 노동3권을 침해한다”, “불법행위를 저지른 사람에게 손배와 가압류를 하지 않으면 준법의식이 흐려진다”며 ‘의뢰인’의 처지를 대변했다.

결국 참석자들은 너무나 익숙한 ‘말의 성찬(盛饌)’만 늘어놓은 채 아무런 소득도 없이 회의장을 떠났다. 스스로 논의시한을 12월 11일로 정해 놓고 다음 회의는 12월 2일로 멀찍이 잡았다.

애당초 이 위원회에 큰 기대를 거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1400여억원의 손배와 가압류를 당한 사업장을 모두 산하에 둔 민주노총이 빠진 데다 정부나 한국노총도 별도로 민주노총과 협의하는 노력을 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따라 노동계 안팎에서는 벌써부터 ‘경영계는 손배와 가압류 남용을 자제하고 노동계는 불법 쟁의행위를 줄인다’는 식의 하나마나 한 사회적 협약을 맺는 선에서 위원회가 결말을 낼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위원회는 이 같은 우려를 깨끗이 씻어야 할 의무가 있다. 손배와 가압류 문제를 어떻게 푸느냐 하는 것은 노동현안 중 하나를 해결한다는 차원을 넘어 다음 달부터 본격 시작될 ‘노사관계 법 제도 선진화 방안(로드맵)’ 논의의 시금석(試金石)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나 한국노총, 경총은 모두 ‘당사자’랄 수 있는 민주노총과 충분히 얘기를 나누는 것은 물론 필요하다면 문을 걸어 잠그고 ‘끝장 토론’을 벌여서라도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결실을 내놓기를 기대한다.

정경준 사회2부 기자 news9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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