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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8월 18일 15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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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흥 수(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1. 개인적인 변(辯)
순교자의 심정으로 이 글을 씁니다. 저는 지난 30여 년 간 그리스도교를 믿으면서 복음이란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의 죄와 문제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어 주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타락 이전의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다시 회복하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사랑과 정의를 위해서 저의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희생적 삶을 살아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깨달음과 실천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에 제가 이 글을 쓰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사랑의 정신으로 쓰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러한 글이 되기를 기도하면서 쓰고 있습니다.
먼저 제가 지난 19년간 법관으로 근무하면서 저의 무능과 불성실로 말미암아 제대로 재판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음을 고백하고, 저의 잘못된 재판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한 모든 분들에게 용서를 비는 바입니다. 다만, 저의 힘이 미치는 한에서는 언제든지 국민의 슬픔과 아픔을 나의 슬픔과 아픔으로 느끼려고 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것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수 있는 길이 있는가를 찾기 위해서 노력하여 왔다는 것을 저의 재판을 지켜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법부를 통해서 이 나라에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넘치기를 항상 소망하여왔습니다. 정의가 살아 있는 사회만이 신의 가호 아래 번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법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양심을 속이지 않고 헌법과 법률에 따라서 소신껏 재판하면서 소수, 약자의 배려를 위해서 보다 헌신하고, 거악을 척결하며 삼권분립의 정신에 따라서 행정부와 입법부를 견제하는 사명을 다함으로써 국민들의 신뢰와 존중을 받는 법관들과 법원이 되기를 한결같이 염원하여 왔습니다.
우리 법원과 법관들에게 긍정적인 측면이 많이 있지만 제가 그러한 점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을 강하게 말하여 온 것은 그러한 염원이 너무나 컸기 때문임을 이해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번 글과 앞으로 3일에 걸쳐서 밝힐 글들에서도 우리 법원의 부정적인 측면을 다시 한 번 강조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법원의 재판 모두가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미리 강조하고자 합니다.
우리 법관들의 우수성과 성실성은 정말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 사법제도의 후진성 때문에 정말로 중요하고 사회적 이목을 끄는 소수의 사건들에서 국민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재판을 할 위험성이 너무나 크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개선해야 한다는 데에 제 글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깊이 이해해주시기를 당부드리는 바입니다.
2. 이번 사건의 원인과 대책
지난 주의 대법관 제청 자문위원회 운영과 관련한 불미스러운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정의의 최후보루요 상징인 우리 대법원의 위상이 실추되고, 국민적 신뢰에 금이 갔으며, 우리 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법관 가운데 한 분이 사직하였고, 소장판사들의 단체건의사태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이러한 사태가 우연한 실수 내지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필연이었다는 점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즉 과거 일제시대의 사법시스템을 이어 받은 우리 사법부는 군사독재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비민주적, 전근대적, 관료적, 폐쇄적 시스템으로 고착되었다는 것이 저의 진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려는 시도가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하였고,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개혁요청이 분출할 때마다 우리 사법부는 땜질식 처방에 그쳐왔다는 점을 아시는 분들은 아실 터인데 이 번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점을 저는 우선 강조하고자 합니다.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 또 다시 사법개혁 내지 사법선진화에 대한 안팎의 요청이 거세지자 대법원은 법관인사제도개선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 논의 주제 가운데 하나가 대법관 임명제청절차였고, 동 위원회의 건의로 대법관제청자문위원회라는 것이 만들어지면서 이번 사태를 결과하게 되었습니다.
문제의 근인(近因)은 우리 대법원이 국민적 사법개혁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한 의사로 개선위원회나 자문위원회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번에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빗발치는 내외의 요청에 밀려서 진정한 개혁의 의사 없이 그 시늉만을 시도하였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증거들을 내일 이후에 밝힐 글들에서도 제시하겠지만, 원론적으로는 위 두 위원회의 구성에 대해서 전혀 내외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대법원이 임의로 어떻게 보면 불가피한 한 두 사람은 진정한 목소리를 낼 사람들로 선임하였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들러리를 서는데 만족할 사람들로 위원회를 구성하였다는 사실 자체에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진단에 대해서 물론 대법원의 반론이 가능하겠지만, 만일 저의 진단이 소수의견에 지나지 않고 오히려 대법원의 반론이 다수의견이라고 주장한다면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느 쪽이 다수의견인가에 관해서 법관전체, 법조인전체, 국민일반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할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설문조사결과 만일 절대 다수가 저의 진단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저는 모든 것을 저의 잘못으로 인정하고 국민들과 법관들 앞에 석고대죄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저의 진단이 사실이라면, 이번 사건을 결코 미봉책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분명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 번 사건으로 진정한 개혁 내지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또 다시 입증된 만큼 그에 대한 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대법원에서 지금이라도 개선위원회와 자문위원회를 개방적으로 구성해서 진정한 개혁에 나서주는 것이지만, 현재의 경직된 마인드를 가진 분들이 대법원의 행정을 좌우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이 가능할지는 심히 기대하기 어렵고, 그 결과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고 또 국가적으로도 사법개혁에 관한 아무런 대안이 마련되지 못한다면, 저로서는 모든 희망을 접고 법관직을 사직하고자 합니다. 어떤 분들은 후임 대법원장에게 기대를 걸자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너무나 먼 일이고 불확실한 일이요, 내일을 아무도 기약할 수 없다는 점에서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글은 여기에서 마치고, 앞으로 3일에 걸쳐서, 우리 사법부의 문제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대법관· 헌법재판관 선임과 대법원· 헌법재판소 운영의 문제, 법관승진과 근무평정의 문제, 법관서열과 합의제 재판의 문제 순으로 계속해서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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