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했다” 장난 채팅에 10개월 억울한 옥살이

  • 입력 2002년 11월 14일 18시 19분


《경찰과 검찰의 부실한 수사 때문에 강도살인범으로 몰려 1심에서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받은 청소년 등이 구속 10개월 만에 항소심에서 누명을 벗었다. 서울고법 형사2부(이성룡·李性龍 부장판사)는 14일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윤모군(19)과 장기 7년, 단기 5년을 선고받은 장모씨(20)에 대해 “피의자 자백만 있을 뿐 다른 물증이 없어 유죄로 인정할 수 없다”며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이들에 대한 경찰과 검찰의 조사는 수사기관에 의해 빚어지는 인권침해의 실상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사건의 개요〓횟집 종업원으로 일하던 장씨는 올 1월 14일 일을 마친 뒤 동네 PC방에서 채팅을 하던 중 장난으로 “사람을 죽였어… 내 손으로”라고 글을 띄웠다가 이를 본 PC방 주인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다.

인천 부평경찰서는 장씨를 지난해 12월 23일 인천 남동구 간석오거리에서 일어난 강도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했다. 장씨는 조사 과정에서 “친구 윤군과 함께 ‘아리랑치기’를 했고 윤군이 반항하는 시민을 흉기로 찔러 죽였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장씨의 진술을 토대로 중국음식점 배달원이었던 윤군을 검거했고 이들은 검찰 조사를 거쳐 재판에 회부됐다. 이 사건 1심 재판을 담당한 인천지법은 검찰의 공소사실을 모두 받아들여 올 7월 이들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부실 수사〓그러나 이날 항소심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하며 밝힌 사건의 전모를 보면 검경의 수사가 얼마나 부실했는지를 알 수 있다.

먼저 윤군은 경찰 수사 당시 “일하던 중국음식점에서 칼을 훔쳐 범행에 사용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중국음식점 주인은 “칼을 도둑맞은 일도 없고 가게에는 네모난 칼만 있다”고 진술했고 피해자는 부검 결과 끝이 뾰족한 칼에 찔려 숨진 것으로 나타났다.

장씨는 PC방에서 채팅을 하면서 ‘부평구 부평동’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찰은 장씨와 윤군을 ‘남동구 간석동’에서 일어난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했다. 장씨가 주장한 살인 지점과 살인사건이 발생한 ‘간석오거리’는 최소한 2㎞ 이상 떨어진 곳. 또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정 결과 윤군이 범행 당시 입고 있었다는 잠바에는 살인사건 피의자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혈흔도 없었다.

▽재판 과정〓이들은 재판 도중 “검찰이 ‘사형이나 무기징역 등을 선고받고 싶지 않으면 사실대로 말하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범행을 시인했다”며 “경찰관이 머리와 어깨, 허벅지를 찌르고 무릎을 꿇린 상태에서 발바닥을 때리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또 1심 재판 과정에서도 검찰과 경찰의 수사 과정에서 가혹행위 등 강압수사가 있었다는 사실과 자신들의 억울함을 알리는 탄원서 수십통을 재판부에 제출했으나 무시됐다.

항소심에서 이 사건을 맡은 송우섭(宋雨燮) 변호사(국선)는 “미성년자가 완벽하지 못한 수사로 인해 인권을 침해당하고 누명을 쓰지 않도록 무리한 기소 등 잘못된 수사관행을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항소심 재판부는 이들이 중국음식점에서 음식을 배달하고 받은 돈 12만여원을 횡령하고 오토바이(70만원 상당)를 훔친 혐의는 인정해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160시간씩의 사회봉사를 명령했다.

길진균기자 l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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