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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10월 31일 16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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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안 될 거예요. 이번엔 옆의 사람과 합작을 해 보세요. 어때요, 쉽게 되죠? …이게 생명의 원리예요. DNA의 두 개의 나선을 우리가 뭐라고 하나요. ‘상보적’이다. 그래요. 생명은 혼자만으로는 안 되는 거예요.”
●“화학은 인간의 이야기다”
서울대 자연대 화학부 김희준 교수(55)는 이번 학기 학부생을 대상으로 ‘일반 화학’과 영어로 강의하는 ‘the world of natural sciences(자연과학의 세계)’ , 두 개의 개론 성격 교양과목을 가르친다. 이 중 ‘일반 화학’은 최근 서울대 교수학습개발센터가 주관하는 ‘우수강의 시리즈’의 첫 사례로 선정됐다.
교수학습개발센터는 1학기에 진행된 김 교수의 ‘일반 화학’ 강의를 촬영, 편집해 약 70분 분량의 CD ‘김희준 교수 이렇게 가르친다’ 1000장을 제작했다. CD 제작목적이 ‘서울대학교 강의 수준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데 있었던 만큼 서울대 교수와 강사, 미래의 교수군인 대학원생,연구원들이 1차 배포대상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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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5일 CD 배포계획이 알려지자 교수학습개발센터 홈페이지(http://ctl.snu.ac.kr/)의 ‘교수학습 자료실’ 게시판에는 CD 구입 문의가 줄을 이었다. 서울 시립대 경영학과, 부산 동의대 한의학과처럼 다른 전공의 교수나 경기과학고, 부산의 사회과 교사 등 고교 교사, 현대건설 기획실의 사내교육 담당자….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그 방법을 놓고 고심하는 사람들이었다. 교수학습개발센터는 30일 김 교수의 CD를 홈페이지에 동영상으로 올렸다.
“저는 학생들이 이 공부를 왜 해야 하나 그 동기를 유발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CD 첫머리의 인터뷰에서 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29일 서울대 자연대 연구실에서 만난 김 교수에게 이 말을 실마리 삼아 질문했다. ‘일반화학’ 강의를 끝으로 평생 다시는 화학공식 한번 되뇔 일 없는 사람에게라면 ‘왜 공부해야 한다’고 설득할 것인가. 고교 시절 밤잠을 설치게 한 미적분이 도대체 이후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었더란 말인가.
“화학은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태초의 빅뱅에서 누구의 기획인지는 몰라도 똑같은 쿼크가 다른 조합으로 결합해 양성자와 중성자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생명의 근원인 DNA가 되고….”
김 교수의 ‘일반 화학’ 시간은 빅뱅과 같은 거대한 사건과 ‘겨우 존재하는 것들’의 미세한 차이가 어떻게 우주와 인간을 만들어냈는가를 종횡으로 오가며 추적하는 대하드라마다.
우주의 별은 10의 22제곱개인데 인간의 몸은 10의 28제곱개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놀라운 인간이여!) 그런데 몸을 구성하는 낱낱의 원자들이 중성인 0의 값을 갖지 않고 단 0.000001의 전하라도 갖고 있었다면 전기적 반발로 몸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이 섬세한 차이!) 태초에 어떤 ‘우주적 마음’이 있어 반목하고 반발하는 전자와 양성자를 묶어내고 화평케 할 중성자를 ‘기획’했을까. 그리하여 원자가 만들어지고 ‘밤하늘의 별’과 ‘내 마음속의 도덕률’에 경외할 줄 아는 인간이 마침내 지상에 존재하게 된 것일까. 김 교수는 과학도인 자신을 전율케 했던 ‘우주적 마음’의 심연으로 이제 갓 스물 무렵의 청년들을 이끈다.
김 교수는 매번 강의가 끝날 때면 ‘1분 페이퍼’라는 수강소감을 받는다. 연구실에 있는 98년판 ‘자연과학개론’ 속표지 앞뒤에 빽빽이 붙은 수강생들의 ‘1분 페이퍼’를 보았다.
‘우주와 원자를 오가는 수업이 재미있었다.’ ‘우주와 인간의 원리를 비교해서 다시 생각했다’ ‘우주는 거대한 실험실이군요. 하지만 성공한 실험실이군요.’…
●진리로 가는 과정도 재미있어야
김 교수는 진리를 깨닫는 방법이 고통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은 재미있다’가 선생님의 철학 같습니다. 문제 풀이보다는 중요한 개념이 공부하는 사람의 것으로 체화되는 것을 중시하시죠. 공식이야 잊어버리지만 체험은 쉽게 잊히질 않잖습니까.”(김종서, 대학원 박사과정)
‘일반화학’의 주 교재는 두툼한 원서 ‘Principles of Modern Chemistry’다. 그러나 강의 시간에는 로댕의 조각도 등장하고 만화도 동원된다. 상품이 내걸리는 퀴즈도 진행된다. 강의를 들으려면 미당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를 차용해 과학시도 써야 한다. 시심(詩心)과 과학자의 직관은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다.
‘태초의 세포 하나를 만들기 위해/푸른 행성 지구는 그렇게 진화했나보다// 긴장과 초조로 가슴 조이던/ 기나긴 우주 진화의 갈림길에서/이제는 돌아와 지구에 접착한/ 자연의 레고 원자들이여….’
“공부를 등산에 비유하자면 정상에 오르는 것이 목표지만 등반의 과정도 재미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것이 김 교수의 ‘교수방법론’이다. 재미의 기술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학생의 눈높이에 맞추는 것이다.
김 교수는 미국에서 ‘동네 사람들’을 상대로 화학을 가르친 경험이 있다. 77년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김 교수는 미 육군 네이틱연구소의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는 한편 보스턴 인근 플래밍엄 주립대의 야간 평생교육과정에서 몇년간 화학을 가르쳤다. 직장경력에 추가하기 위해 주경야독하는 학생도 있었지만 오로지 호기심으로 화학공부를 자청한 아주머니 할머니도 있었다. 교과서가 아닌 다른 수업 방법을 찾아야 했다. ‘교양강좌로서 화학강의’의 중요성을 깨달은 이 강의를 기억할 때면 김 교수는 65세 할머니 수강생의 강의소감을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처음 강의가 시작됐을 때는 내가 끝까지 갈 수 있을까 두려웠다우. 하지만 이제는 자연에 대해 알게 된 게 기쁘구려.’
97년 서울대에 부임한 김 교수는 곧 계절학기에 ‘자연과학개론’강좌를 열었고 지금껏 강의해오고 있다. 이 강의를 위해 준비한 노트로 ‘자연과학의 세계’라는 개론서도 출간했다. 김 교수는 개론강의를 끝으로 다시는 과학공부를 할 기회가 없을 비전공자들을 위해서나, 더 차원 높은 과학의 세계로 입문할 전공자들을 위해서나 교양강의는 더없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65세 할머니가 시민적 교양을 쌓기 위해 화학을 배우는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의 과학기술수준은 다를 수밖에 없다.
“교수는 연구와 강의 두 가지 다 균형을 맞춰야 하지만 저는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서울대는 ‘연구중심대학’이 돼야 합니다. 하지만 그 중 20% 정도의 교수는 교육자로서의 역할에 무게를 싣는 역할분담이 돼야 하지 않을지….”
김 교수가 수업 중에 특히 반기는 답은 “잘 모르겠는데요”다. ‘모른다’는 완결된 답이 아니다. 답을 한 학생이 자신이 정말로 무엇을 모르는지를 파악할 때까지 김 교수는 각도를 바꾸어가며 다시 질문한다.
우주가 아름다운 것은 우주를 이해하려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그러지 않았던가.
“우주에 관해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이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는 거다(The most incomprehensible thing about the universe is that it is comprehensible)”라고….
정은령기자 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