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해지역 귀경객 “발이 안떨어져요”

  • 입력 2002년 9월 22일 18시 25분


“어머니를 모시고 와야 했는데….”

강원 강릉시 입암동의 고향집이 완전히 물에 잠겼던 한덕훈(韓悳勳·38·서울 동작구 사당4동)씨는 22일 오후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수해 이후 두 번째로 찾은 고향집은 이제 겨우 물이 말라가고 있었다. 컨테이너집은 외로워서 싫다며 친척집을 전전하던 어머니 허순자씨(64)를 위해 습기와 냄새가 아직도 남은 집 안방에 새로 장판을 깔고 벽지를 발랐다.

한씨는 40여년 전 시집와서 이 집에서 계속 살아온 어머니에게 “이제는 집을 떠나야 할 것 같다”고 청했으나 어머니는 “내가 가봤자 어디를 가겠느냐”며 단호히 거절했다.

한씨는 “세간이 모두 떠내려간 휑한 집에서 어머니가 혼자 주무시다 몸이라도 상하지 않을까 걱정”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추석 연휴 마지막날인 이날 고향에서 한가위를 보내고 서울로 돌아온 대부분의 귀경객은 피곤하지만 밝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한씨처럼 수해지역이 고향인 일부 귀경객들의 발걸음은 매우 무거워 보였다.

추석 연휴를 컨테이너집에서 칠순 부모와 함께 보낸 정하광(鄭夏光·39·인천 남구 주안동)씨도 답답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돌아왔다.

정씨는 지난달 31일 경북 김천시 대덕면 화전2리의 고향집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내려가 나흘간 복구작업을 도왔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17일 다시 내려갔다.

부모가 기거하는 컨테이너집 생활은 수도가 연결되지 않아 지하수를 길어다 먹어야 하는 등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화장실도 부족해 정씨는 아예 귀성길에 이동식화장실을 사 가지고 갔다.

인천 부근의 한 공단에서 일하면서 혼자 살고 있는 정씨는 귀경길 내내 부모를 모실 여력이 없는 자신을 책망했다.

강원 양양군 서면 용천리가 고향인 박상수(朴商守·37·경기 고양시 일산)씨는 17일 고향집으로 가 닷새 동안 홀어머니(61)와 함께 컨테이너집에서 지냈으나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하루를 더 묵기로 했다.

박씨의 가슴을 더 아프게 한 것은 처참하게 변한 마을 모습이었다. 할아버지 때부터 50여년간 살던 집은 완전히 침수돼 뼈대만 남았고 집 주위 과수원은 대부분의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간 뒤 온통 뻘밭으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길진균기자 leon@donga.com

▼“할일 태산같은데 집에 갈수 있나요”▼

추석인 21일 낮 12시 강원 강릉시 주문진읍 장덕2리 하천변에 마련된 합동차례 현장. 수재민과 자원봉사자 등 70여명이 참석한 이곳에서는 주민들의 애달픈 마음과 봉사자들의 따뜻한 인정이 어우러져 코끝을 찡하게 하는 감동이 연출됐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가운데 합동차례가 시작되자 주민 박이선(朴伊善·52)씨가 서울에서 온 자원봉사자 정한일(鄭韓一·18·장훈고 2년)군의 손을 잡았다. 박씨는 이어 “추석에 집에도 가지 않고 비를 맞으며 우리 집에서 일하는 것을 보니 너무 안쓰럽다”며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딸 다섯을 출가시키고 혼자 살다가 집이 쓸려 내려가는 수해를 당한 최은집(崔銀集·86) 할머니는 “2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의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모든 것을 잃었다”며 “남편에게 절을 하며 슬픈 가슴을 달래고 싶다”고 울먹였다.

추석인데도 고향에 가지 않고 수해 복구를 돕다 합동 차례에 참석한 자원봉사자 50여명은 “어려운 형편에 처한 수재민들을 두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며 “오늘의 합동차례가 수재민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는 자리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릉〓경인수기자 sunghy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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