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전업주부 vs 취업주부의 자녀교육경쟁력

  • 입력 2002년 9월 5일 16시 21분



《"큰 아들 대학 떨어지니까 모두 내 탓을 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다. 일 붙들고 있다가 아이 인생 망쳤나 싶어서…."(중앙 정부 모 여자 국장)

"딸아이가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에 합격했을 때 남편이 말했다. '당신 수고했어. 고마워'."(지방 정부 모 국장의 아내)

자녀의 성적은 곧 엄마의 성적인가? 아이가 공부 잘하고 얌전히 자라주면 그 공이 엄마에게 간다. 거꾸로 아이가 처지는 성적표를 내밀어도 엄마 책임이다.

'맞벌이 부부 아이들이 공부를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거꾸로 '전업 주부 아이들이 집안에 역할 모델이 없어 사회 생활에 뒤진다'고도 한다.

국내외 실증 연구 자료를 들춰보았다. 수치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공백을 메우기 위해 교육 정도와 소득 수준이 비슷한 일하는 엄마와 전업 주부 각 10명을 선정해 심층면접했다.》

●엄마 대신 사전을 찾아라

경제부처 A국장(55)은 큰아들(27)이 초등학생이 되자 몇가지 교육 원칙을 세웠다.

첫째, 부모의 손을 완전히 벗어나 스스로 하도록 길들이자.

둘째,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칭찬하지 말자.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데 대해 보상을 주어서는 안된다.

셋째, 과외는 시키지 말자. 시류를 따를 만한 시간도 돈도 없다.

A국장은 아들을 앉혀놓고 말했다.

“네 스스로 모든 걸 해결해라. 엄마가 오기를 기다려서 숙제할 생각은 하지 마라. 숙제를 하지 않아 학교에서 매를 맞더라도 그건 네 책임이다. 모르면 엄마 대신 사전을 찾아라.”

큰아들은 순종적이었다. 작은 아들(24)은 달랐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자 반항을 시작했다.

“학교 가기 싫어.”

“학교 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도 돼. 시험 삼아 한달쯤 학교를 쉬어보자. 그 후에도 가기 싫으면 학교를 그만 두렴.”

작은 아들은 한참 생각하다 말했다.

“학교 다닐래.”

국장은 직장에 매이는 시간을 빼고는 전적으로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고 뒹굴었다. ‘공부하라’ 소리는 해본 적이 없다. 잔소리를 하지 않으니 엄마와 형제는 사이가 좋았다. 대신 국장은 골프도, 변변한 취미 생활도 해본 것이 없다. 동창회도 챙겨본 적이 없다. 집안일은 가정부가 맡아서 했다.

‘1등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 두 아들은 서울대 기계학과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홍보 회사를 경영하는 정사장(47)도 외아들(19)에게 자립심을 길러 주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스스로 이부자리를 개도록 했다. 내가 하면 1분이면 될 일을 아이는 10분도 넘게 붙들고 있었다. 바쁜 아침 시간에 속에서 불이 났지만 기다렸다.”

학교 숙제나 준비물도 도와주지 않았다. 학교 교사에게는 이렇게 당부했다.

“아이가 숙제나 준비물을 빼먹으면 꼭 야단쳐 달라. 부모가 무심해서 챙겨주지 않은 게 아니다. 혼자 해결하는 습관을 들여주기 위해서다.”

성적이 상위권이던 아들은 고교 1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스스로 준비물 챙기고 이부자리를 개더니 미국에서도 기숙사 생활을 잘 해나가고 있다.

●전업주부는 아이의 매니저

전업 주부들은 자녀의 학교 성적으로 평가 받는다고 생각한다. 경제부처 과장의 부인 오모씨(46)도 그랬다.

“아이가 공부 잘 하도록 돕는 게 내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통해 대리 만족을 얻고 싶었다.”

오씨는 머리 좋고 성취욕 강한 ‘스타성’ 있는 남매를 입시계의 스타로 키워낸 노련한 ‘매니저’다. 딸(20)은 대원외고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가 3년만에 조기 졸업한 뒤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다. 역시 대원외고 출신인 아들(18)은 서울대 사회대 1학년생이다.

오씨가 강조한 스타 트레이닝의 원칙은 일관성. 남매는 일찌감치 ‘떼를 써도 안된다’는 걸 터득했다. 딸은 초등학교 6년간 수학 학습지로 공부했는데 단 하루도 밀린 적이 없다. 휴가를 갈 때는 3일치든 4일치든 휴가 일수 만큼을 미리 해 놓고 갔다. 피아노도 그랬다. 휴가를 떠나는 날이 레슨받는 날이면 새벽에 레슨을 받았다. 아들은 수영을 하기 싫어했다. 하도 싫어해 원형 탈모증까지 앓았다. 하지만 ‘한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한다’며 밀어붙였다.

미국으로 파견 근무를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3년간 미국에서 살다온 남매는 귀국하자 수험생이 됐다. 오씨는 신문, 전단지, 입시설명회 등 모든 정보망을 가동해 남매에게 맞춤한 입시 정보와 학원 강사를 제공했다.

오씨의 정보망 가운데 특히 유효했던 것은 9명으로 구성된 외고의 학부모 모임. 매월 1회 이상 정기적으로 모여 각종 입시 정보를 교환하고 아이에게서 하나 둘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풀어다 퍼즐 맞추듯 자녀의 학교 생활을 파악했다.

공교육이 위기를 맞고 있는 최근에는 ‘엄마 네트워크’의 위력이 더욱 힘을 얻고 있는 듯하다. 중앙 정부 과장의 아내 장모씨(40)는 맏딸(13)이 초등학교 2학년 때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아파트 이웃들이 “과외 같이 하자”고 접근했지만 장씨는 “아이 잡을 일 있느냐”며 거절했다. 지금은 “내가 서울 물정을 너무 모르고 잘난 척 한 것같다”며 후회한다.

“딸아이는 자기 학년에 맞는 진도를 착실히 따라간다. 그런데도 선행학습 하는 친구들에 기가 질려 자신감을 잃고 있다.”

●‘극성’스러운 취업 주부들

의류업체를 경영하는 송모사장(45)은 철저히 시류를 따르는 스타일이다. 늦게 얻은 남매는 서울의 유명 사립 초등학교 3학년과 1학년에 재학중이다. 육아 ‘트렌드’에 귀를 열어두고 싶었지만 출산이 늦어 또래 학부형들이 한참 어린데다가 전업 주부가 아니어서 네트워크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송 사장은 자청해 학교 이사를 맡았다. 이사가 되니 학부모들의 주소록이 자연스럽게 확보됐다.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계모임을 갖는 전업 주부들을 보며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비싼 밥먹으며 수다 떤다고. 그런데 그 모임에 끼어보니 내가 필요한 정보가 거기에 다 있었다. 어디 학원이 어떻고 그 학원을 가려면 새끼 학원은 어디를 다녀야 하고…. 지금은 정기적으로 모이거나 연락하는 네트워크가 8개나 된다.”

송 사장은 퇴근할 때까지 아이들을 과외에 붙들어둔다. 방과후 월 수 금은 영어학원, 화 목은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운다. 저녁식사 후엔 2시간동안 대학생 2명이 교대로 남매를 돌봐준다. 송 사장은 남매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미국의 사립 학교로 유학 보낼 계획이다.

“‘대열’에 끼여 키울 계획이다. 늦게 합류하면 못 따라간다.”

중앙 정부의 B국장(56)도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를 실천한 ‘극성’스러운 엄마였다.

“이사를 밥먹듯 했으니 부동산 투기라도 한 줄 알 거다. 우스갯소리로 ‘나는 총리 시켜줘도 못한다’는 말을 한다.”

엄마의 감시에서 벗어나 하루종일 친구들과 지내야 하는 아이들을 위해 최적의 환경을 찾아다녔다. 동네 친구들이 거칠다 싶으면 채 한달도 안돼 이삿짐을 꾸린 적도 있다. 비원에서 놀 수 있도록 비원 앞에서 살기도 했다.

초등학교는 사립을 보냈는데 초등학교 교사인 친구들에게 일일이 전화해 학교를 골랐다. 조건은 ‘일하는 엄마 대신 아이를 살뜰히 봐주되 치맛바람이 거세지 않아 일하는 엄마가 불리하지 않은 곳’이었다. 형제는 그 조건에 부합하는 사립학교를 졸업한뒤 큰아들(29)은 중국 칭화대에서 유학중이고 작은아들(28)은 서울 과학고를 나와 카이스트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취업 주부의 자부심, 그리고 불안

대학생 자녀를 둔 맞벌이 엄마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엄마가 아이 곁에 붙어 있는다고 다 잘되는 것은 아니다. 엄마의 삶도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시키고 엄마 스스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경제부처 A국장은 말했다.

“늘 책상에 앉아 책을 뒤적이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영어로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할 때는 어린 아이들을 앉혀두고 연습하기도 했다. 엄마가 하루하루를 긴박하게 사니 아이들도 스스로 느끼는게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자녀를 둔 후배 맞벌이 엄마들은 불안해 한다. 초중학교에 수행평가가 도입되면서 아이의 숙제와 시험이 엄마의 몫이 돼가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 상무의 부인인 전업주부 김모씨(43)는 중학교 1학년인 아들과 학교 진도를 같이 나간다. 내일 요리 실습시간에 썰기 시험을 치른다면 오늘밤 아들과 깍둑썰기 어슷썰기 등 각종 썰기 연습을 한다. 줄넘기 시험이 있으면 줄넘기를, 배드민턴 실기를 본다면 배드민턴을 친다.

의류업체를 경영하는 맞벌이엄마 김 사장(36)은 숙제 때문에 초등학교 5학년인 딸의 원망을 들어야 했다. 토마토를 키워보고 관찰일기를 쓰는 숙제였다. 다른 아이들은 엄마랑 같이 키워서 토마토가 무척 싱싱했는데 딸아이 것만 쪼글쪼글하고 작더라는 얘기다.

“아이 숙제가 엄마 숙제가 돼 버렸다. 학교 시스템이 엄마가 집에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돌아간다. 이렇게 경쟁적인 환경에서 아이를 키워야 하나 회의가 든다.”

김 사장은 딸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미국 동부쪽으로 유학을 보낼 계획이다.

글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일러스트 정인성기자 71j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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