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이 희망이다]자율적 학교운영 아직 걸음마단계

  • 입력 2001년 10월 19일 18시 57분


17일 서울 동작구 상도2동 장승중학교 교장실. 학교운영위원회 위원들이 둘러앉아 졸업생 앨범 제작 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지난해에는 학생들의 글과 사진을 넣어 문집 형태로 아기자기한 졸업앨범을 만들었더니 평이 아주 좋았습니다. 종전처럼 만들려면 단가 3만5000원으로는 어렵습니다.”

특별활동부장이 설명을 마치자 위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앨범의 크기와 종이 질을 조금 낮추면 어떨까요.”

“추억으로 남는 것인데 너무 형편없이 만들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예산 부족 때문이라면 학부모회에서 다소 보태주더라도 학생들의 마음에 드는 앨범을 만들어줍시다.”

위원들은 예산을 지원해 지난해 수준의 좋은 앨범을 만들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학부모위원 장명숙씨(40·여)는 “아들이 다니는 학교의 일을 맡아보면서 학교의 사정이나 방침 등을 더 잘 이해하게 됐다”며 “학교 구성원이 함께 논의해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기 때문에 평소 일방적인 결정에 뒤따르는 불만도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이 학교 김유한(金裕漢) 교장은 “학생들이 매점 설치를 요구해 학운위에서 논의를 거쳐 수위실에 매점을 만들었다”면서 “학운위와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해 학교를 운영하기 때문에 학교 구성원들의 학교에 대한 애착심이 더 커진 것 같다”고 말했다.

교육자치의 일환으로 지난해부터 전국 1만185개 초중고교 가운데 99.9%인 1만178개교에서 학교운영위원회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학부모 교원 지역인사 대표들이 위원으로 참여해 학교운영 등을 논의하고 있지만 아직은 걸음마 단계다.

학운위원은 학교 규모에 따라 5∼15명으로 구성된다. 학부모 위원은 학부모 전체회의에서 선출하되 곤란한 경우 학급별 대표가 모인 학부모대표회의에서 간선으로 선출할 수 있게 했다. 교원위원은 당연직인 교장과 교사로 구성된다. 교원위원은 국공립의 경우 교직원전체회의에서 무기명 투표로 선출하고 사립은 교직원전체회의에서 추전한 인사 중 학교장이 위촉하게 되어 있다. 또 지역위원은 학부모 교원위원의 추천과 투표로 선출된다.

아직까지는 학부모들이 학운위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 학부모위원들은 대부분 간선으로 선출돼 대표성이 약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초중고교의 32.9%인 3309개교가 학부모 위원을 간선으로 선출했고 특히 서울 부산은 간선비율이 각각 78.7%, 83.4%나 된다.

국회 이규택(李揆宅)교육위원장은 “시도교육청 평가에서 간선비율이 높은 시도에 불이익을 주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며 “직접 선거의 비율을 높이기 위해 서신투표(부재자 투표)제도를 도입하는 등 운영위원의 대표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공립학교는 학운위가 심의 의결기구여서 교장은 결정사항을 이행해야 하는 구속력이 있지만 사립학교는 ‘사학의 권한’을 내세워 학운위의 심의기구화를 반대해 현재 자문기구로 운영되고 있다.

국공립 학운위는 예산결산, 교육과정, 교과서 선정, 특별활동, 학교급식, 대입특별전형 중 학교장 추천자 선정 등 학교 운영에 관한 거의 모든 사항을 심의한다. 사립 학운위는 학교의 요청이 있을 경우 예결산 및 초빙교원 추천 등을 자문하는데 그치고 있다.

학운위는 그동안 폐쇄적이었던 학교 운영에 교사와 학부모 등이 참여하고 운영과정이 공개됨으로써 학교 민주화에 기여하고 있다. 실제로 급식, 수학여행, 앨범, 교복 등 불신과 비리의 대상이었던 분야의 투명성이 크게 제고됐다.

인천 S중학교 학운위는 교복을 바꾸면서 학생 학부모 교직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여 60.3%의 교복을 바꾸기로 했다. 기존 교복업체들은 재고가 많다는 이유로 디자인공모나 교복견본 제공에 비협조적이었으나 신문광고를 통한 업체선정과 공평한 품평회 등을 거쳐 올해부터 교복을 바꿨다. 물론 교복단가를 크게 낮춰 학생들의 부담을 줄이는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학운위 운영과정에서 교장과 교사가 마찰을 빚는 경우도 많다. 평교사들이 학운위원으로 참석해 교장을 비방하거나 정책결정에 제동을 걸어 학사가 마비되는 경우도 있다.

경륜있는 교사는 출마를 기피하고 교원노조 소속 교원들은 노조원들을 당선시키기 위해 치열한 운동을 벌어 교사끼리 반목하는 등 부작용도 빚어지고 있다.

한국국공사립초중고 교장협의회는 지난 4월 “학운위가 교장의 학교운영권을 침해하고 선출과정에서 학교 구성원간의 갈등을 초래하는 등 부작용이 있다”며 모든 기구를 심의 의결기구가 아니라 자문기구로 전환해줄 것으로 요청하기도 했다.

서울K초등학교의 교장은 “위원들이 학교 일에 너무 깊숙이 개입하려는 일이 있어 교장들은 권한을 침해받는다고 생각한다”며 “서로 빼앗고 빼앗긴다는 인식이 없도록 합리적인 학운위 활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부 학교장들은 학운위 결정을 부정하고 독단적 학교경영을 고집하는 등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시도 교육청은 학운위원들의 전문성 부족 등을 개선하기 위해 운영위원 연수회 등을 실시하고 있지만 이 역시 관심 부족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교육부 김평수(金坪洙) 지방자치지원국장은 “심의결과와 학교장의 의견이 상충될 경우 교육당국이 개입하기 보다 사유를 공개하는 등 자율 해결을 유도해야 한다”며 “사립 학운위도자문기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학교 구성원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공립·사립학교 학교운영위 비교▼

구분국공립학교사립학교
성격필수적 심의기구필수적 자문기구
선출
방법
학부모
위원
학부모 전체회의에서 직접 선출
(전체회의에서 선출이 곤란한 경우 학급별 대표가 간선 가능)
국공립학교와 같음
교원
위원
학교장은 당연직 교원위원국공립학교와 같음
교직원 전체회의에서 무기명투표로 선출정관 절차에 따라 교직원회의에서 추천한 자 중 학교장이 위촉
지역
위원
학부모위원 또는 교원위원 추천으로 학부모위원 교원위원이 무기명 투표 선출국공립학교와 같음
의무
보고
심의결과와 다르게 시행하거나 심의 않고 시행한 경우 학운위와 관할청에 서면 보고자문을 거치지 않고 시행한 경우 학운위와 관할청에 서면 보고

▼서울 장승중 이선화 학운위장▼

“처음에는 학교운영위원회가 삐걱거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학부모 교사 지역대표가 머리를 맞대고 학교 문제를 고민하다 보니 모두가 애교심이 더 깊어져 서로 협력하게 되더군요.”

서울 장승중 학교운영위원장인 이선화씨(57·여·사진)는 학교운영위와 학교가 상호 보완관계를 이루면서 학교 운영이 훨씬 더 원만했졌다고 강조했다.

이 위원장은 이미 자녀를 대학에 보내 이 학교의 학부모는 아니지만 지역대표로 학운위에 지난해부터 참여했다. 지역사정에 밝은데다 ‘마당발’인 점 등이 인정받아 위원장으로 추대됐다.

“솔직히 전에는 학부모들이 학교에 대해 불만이 있어도 ‘혹시 내 아이가 불이익을 받지않을까’하며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지금은 학부모들이 불만이나 건의사항을 학운위원에게 수시로 전달합니다. 학운위에서 충분히 논의해 의사결정을 하고 학교측도 학부모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학부모 대표 중에는 교장과 교사들이 충돌하면 어떻게 하나 우려하기도 했지만 젊은 교사들이 신선한 아이디어도 많이 내는 등 학운위 운영에 매우 적극적”이라며 “학운위가 교내 구성원간 이견을 조정하는 가교(架橋)역할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녀는 “학부모들이 교내 봉사활동과 매점운영 등에 참가해 아이들을 접하면서 요즘 아이들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방황하는지 파악하는 기회가 자연스럽게 마련됐다”면서 “이제 학부모들도 자녀지도를 학교에만 맡기지 말고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교육에 참여해야 진정한 교육자치가 이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위원장은 올 여름 인근 학교의 학운위 대표들을 모아 충남 대천에서 ‘학운위 연수회’를 갖는 등 서로 경험을 나누면서 정보도 공유하고 이를 학운위 운영에 반영하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이 위원장은 요즘 쾌적한 교육공간을 마련해주기 위해 교내에 장학관을 건립할 계획을 세우고 건축 설계까지 마쳤지만 재원 조달이 만만치않아 교장과 학운위원들이 독지가를 찾아 백방으로 뛰고 있다.

▼사립중고법인협의회 이방원 정책실장▼

“학교운영위원회가 학교의 중요한 업무에 대한 심의 의결권을 갖게 되면서 학교장의 책임경영제가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학운위가 제 기능을 하려면 학교 구성원들의 인식 전환과 함께 제도 보완이 필요합니다.”

한국사립중고법인협의회 이방원(李方遠·사진) 정책실장은 학운위가 좋은 취지에서 출발했지만 전교조 교사 등이 학운위를 좌지우지하면서 학교장을 ‘거수기’로 만들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 실장은 “사립학교는 학운위가 자문기구여서 아직 큰 문제는 없지만 국공립학교는 심의 의결기구여서 학운위의 결정사항을 교장이 따를 수 밖에 없다”면서 “학운위가 학교 운영에 너무 깊숙이 개입하면 학교 책임자인 교장이 어떻게 학교를 이끌어갈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교장 교사 학부모 등 학교 구성원이 학교 문제를 합리적으로 이끌어간다면 좋지만 일부 교사들은 사사건건 교장의 활동에 제동을 거는 등 사실상 학교 경영권을 장악한 곳도 있습니다.” 그는 “교사들의 힘이 센 학교에서는 교장이 교사들에게 끌려다니는 바람에 학교장이 자신의 교육정책을 소신있게 펴지 못하는 사례도 있다”면서 “이같은 현상은 결과적으로 공교육 부실화로 이어져 학교 교육을 황폐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같은 부작용을 줄이려면 국공립학교 학운위도 심의 의결기구가 아니라 자문기구로 전환해야 한다”면서 “학운위가 자문기구가 되면 유명무실화될 것 이라는 우려도 있지만 건전한 교장이라면 학운위의 결정이나 건의를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이를 어떻게 운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며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빼앗겠다는 잘못된 의식이 교육현장에서 만큼은 사라져야 합니다.”

이 실장은 “사학 경영자들도 ‘내 학교인데…’라는 인식이 변해 자문기구인 학운위와 협력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면서 “학교 구성원들의 의견을 수렴하면 결정에 대한 정당성도 강해지는 만큼 열린 마음으로 학교를 경영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인철기자>in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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