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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11월 14일 18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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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재무부채권(TB)이나 해외펀드쪽의 투자는 어떻습니까?”(상담직원) 고객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상담원은 당장 “씨티뱅크의 신용등급이 우리나라의 신용등급보다 높아 국내 어디에 투자하는 것보다 일단 안전하고 앞으로 경기 하락으로 원―달러 환율이 오르면 환차익까지 챙길 수 있다”며 설득에 여념이 없었다. 돈을 어디에다 맡겨야 할까. 내년 금융소득종합과세의 시행을 앞두고 경기가 침체될 것이라는 우려가 퍼지면서 뭉칫돈이 ‘안전지대’를 찾아 나서고 있다》
은행권만 따져 약 40조원으로 추산되는 개인 보유 뭉칫돈을 잡기 위해 이미 국내 금융기관 프라이빗뱅킹팀은 비상이 걸린 상태. 특히 뭉칫돈 중 상당수는 해외쪽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씨티 HSBC 등 외국계은행과 외국계 증권사도 이들을 잡기 위한 마케팅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주로 강남 압구정동 분당 등에 새로 지점을 내고 예금을 유치하고 있다.
하나은행 프라이빗뱅킹팀의 김희철 팀장은 “고액자산가들은 경제상황을 봐가며 대부분 단기로 운용하면서 투자결정을 연말로 미뤄놓은 상태여서 11∼12월에 대거 만기가 도래한다”며 “이들이 내년 금융종합소득과세를 앞두고 눈치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달러자산이 안전한가〓거액자금이 최근 눈을 돌리고 있는 곳이 해외투자다.
외국계 증권사의 한 고위 임원은 “최근 적게는 수억원에서 많게는 수십억원까지 들고와 해외에서 운용해달라는 VIP고객들이 늘고 있다”며 “이들로부터 받는 수수료가 국내 고객들로부터 받은 수수료를 웃돈다”고 말했다.
한화증권 진영욱(陳永郁)사장은 “외국계 펀드에서 ‘한국의 자금이 미국으로 온다고 알고 있다’며 직접 상품설명서를 들고 와 제휴하자는 제의도 많이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이 주로 투자를 권유하는 금융상품은 미국 재무부채권(TB). 현재 금리가 6.5% 정도인데 내년에 TB금리가 떨어질 가능성(채권값 상승)이 높기 때문에 자본이익이 발생하고 무엇보다 한국경기 침체로 원―달러 환율이 오르면 환차익도 챙겨 15% 이상 수익이 가능하다는 것. 무엇보다 미국 재무부채권만큼 안전한 것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 외국환거래법에는 개인의 경우 1만달러까지 해외투자를 할 수 있지만 증권사에서는 차명계좌 등으로 법망을 피해 투자를 해주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화증권 진사장은 “자본자율화로 가는 과정에서 이같은 현상은 불가피하지만 원―달러 환율 향방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무조건적인 해외투자는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LG경제연구원 이창선(李昌善)연구원은 “거액예금자들이 국제 분산투자를 하려는 투자행태는 가속화될 것”이라며 “일정 정도의 자본 유출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최근 명동과 남대문상가에서는 한때 자취를 감췄던 암달러상들이 다시 등장해 달러 사재기 수요가 급증하고 있음도 이를 반증하고 있다.
▽비상 걸린 은행권〓일부 은행들이 거액예금을 잡기 위해 최근 은밀하게 판매하고 있는 상품은 은행권 표지어음. 이 상품은 미리 선이자를 떼면서 22%의 이자소득세를 곧바로 원천징수해버리기 때문에 만기가 되더라도 세금을 낼 필요가 없는 상품이다. 즉 올해 안에 가입하면 내년부터 만기가 도래하더라도 금융소득 종합과세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거액 자산가들에게는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후순위채와 분리과세형 상품에도 거액자금이 꾸준히 몰려들고 있다.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을 피해주는 각종 프로그램도 자산운용사와 금융포털 사이트에서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 한국은행 박재환(朴在煥)금융시장국장은 “금융소득종합과세를 앞두고 거액예금의 이동은 부실금융기관의 존립을 더욱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박현진·이나연기자>witnes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