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붕괴①]교육현장의 실상/뭘 어떻게 가르칠지…

  • 입력 2000년 7월 3일 19시 08분


무더위가 맹위를 떨친 3일 서울 A고 국어시간. 교사가 방학기간에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체크 포인트를 짚어주며 질문을 던졌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학생 49명 가운데 10명 정도는 아예 엎드려 잤으며 나머지도 딴청을 피우는 학생들이 많았다. L교사는 수업 분위기를 살리려고 애를 썼지만 맥빠진 광경은 종이 울릴 때까지 계속됐다.

수업을 마친 L교사는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터질 것 같다”면서 “질문은 고사하고 묻는 말에 ‘예’ ‘아니오’라는 대답도 없어 노인대학에서 강의하는 느낌”이라고 한숨을 지었다.

같은 학교 교무실에서 만난 교사들도 교육 현장의 답답함을 이구동성으로 쏟아냈다.

“중학교 과정의 기초적인 1차 방정식을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1/2 +1/3〓1/5이라고 대답하는 학생들에게 미분 적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다.”(수학교사)

“어버이날 부모님께 쓴 감사의 편지에 ‘귀하’와 ‘올림’을 바꿔 쓴 것이 수두룩했어요.”(사회교사)

“학생들이 ‘키친(kitchen)’을 ‘키첸’으로 읽거나 발음기호를 봐도 어떻게 읽을지 몰라 쩔쩔매요.”(영어교사)

서울 P고 S교사(33)는 올해 초 자신이 담임을 맡은 학생들에게 질린 적이 있다. 학생들에게 OMR카드(컴퓨터 입력용 카드)에 이름 등 인적사항을 적는 법을 자세히 설명했으나 제대로 카드를 작성한 학생은 45명 가운데 20명에 불과했다. 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학생들의 집중력과 이해력 수준을 드러낸 현주소라는 것이 S교사의 설명이다.

이같은 학력 저하는 과거처럼 몇몇 문제 학생들만의 현상이 아니라 대부분 학생들의 ‘우둔화’라는데 심각성이 있다. 교사들은 기초 지식을 이해하거나 외우지도 못하는 학생들에게 과연 사고력, 창의성 교육이 가능한지 의문을 제기한다.

학생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 J고 2학년 최모군(18)은 “설명이 어려운데 선생님은 일방적으로 강의만 한다”며 “차라리 내 수준에 맞는 학원에서 공부하는 게 속이 편하다”고 토로했다.

교육 전문가들은 초등학교 단계부터 누적된 학습 결손과 무시험 전형의 고교 진학제도 등을 학력 저하의 원인으로 꼽았다. 여기에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에 갈 수 있다’는 대학입시에 대한 인식도 큰 몫을 하고 있다.

학부모 김순미씨(42)는 “아들에게 공부 좀 하라고 잔소리를 해도 ‘시험도 안보는 데 왜 그러느냐. 내 특기를 살릴 테니 걱정 말라’고 대들어 당황했다”고 말했다.

서울 용산고 이진걸교무부장은 “특성화 교육이 강조되면서 학생들이 공부를 등한시하는 현상이 뚜렷하다”며 “그렇다고 학생들이 특기 적성을 개발하는 데 시간을 쓰는 것이 아니라 놀고 즐기는 일에만 관심이 많아 더 큰 문제”고 말했다.

각 고교에서는 ‘중학교 과정 특별반’을 운영하는 등 갖가지 노력을 하고 있지만 지금 같은 교육 여건에선 별 다른 효과가 없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수준별로 반을 편성하더라도 교사 교실이 부족해 실질적으로 개별지도가 불가능하고 저학력 학생을 위한 마땅한 교재도 없다는 것.

교육 당국은 신세대 학생들의 사고력 등은 과거에 비해 크게 향상되고 있는 만큼 기성세대의 잣대로만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선 교사와 학부모들은 자녀의 학력 저하에 노심초사하고 있다.

<이인철기자>in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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