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투표 초점]산불피해 주민들 "투표할 정신 없어요"

  • 입력 2000년 4월 13일 19시 42분


투표일인 13일 산불이 난 강원 동해안 지역의 투표율이 15대 총선 때보다 현저히 떨어지자 관련 시군과 선관위 등은 차량을 동원해 가두방송을 하는 등 투표를 독려했다.

그러나 산불피해 주민들은 대부분 “이런 경황에 어디 투표할 생각이 나겠느냐”며 투표에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이날 새벽까지 화마(火魔)에 포위돼 불안에 떨며 밤을 지새운 북삼동과 천곡동 주민들은 대부분 투표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 21채의 가옥이 불탄 북삼동 분토골과 숫골 등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 주민들은 이날 오전 밭둑에 모여앉아 복구대책을 상의하느라 분주했다.

분토골 주민 김월하(金月河·80·여)씨는 “밤새 분무기로 집 주변에 물을 뿌리고 가재도구들을 집 밖으로 옮기느라 진이 다 빠졌는데 투표할 정신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했다.

시 선관위에 따르면 이날 오후 2시 현재 전체 10개 동 가운데 화재피해를 심하게 본 천곡동과 북삼동의 투표율이 30%대에 그친 반면 나머지 8개 동의 투표율은 모두 40%를 넘었다.

시 선관위 관계자는 “차량을 동원해 산불피해를 심하게 본 지역을 중심으로 투표를 독려하는 가두방송을 하고 있다”며 “하지만 산불피해 지역의 투표율이 떨어져 시간대별로 전체 투표율이 15대 총선에 비해 6∼7%포인트 정도 낮은 것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같은 상황에서도 투표소로 발길을 옮기는 주민들도 적지 않았다.

이날 오후 잿더미만 남은 집터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던 김영호(金榮浩·63)씨는 “쌀 한톨, 옷 한점도 남은 것이 없어 맨몸으로 밖에 나앉게 생겼지만 국민으로서 해야 할 일은 한다는 생각에 오전 7시경 투표를 하고 왔다”고 말했다.

또 회사원 박만수(朴晩壽·45·북삼동)씨도 “어려울 때일수록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다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아침 일찍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투표를 마쳤다”고 말했다.

삼척시 미로면 사둔1리 26가구 주민 89명은 이날 오후까지도 마을 인근에 불이 번져 불안에 떠느라 투표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또 밭과 마당 등에는 집이 탈 경우에 대비해 내놓은 가구 등이 널려있어 어수선한 상태였으며 밭둑에는 60, 70대 노인 6명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홍춘옥(洪春玉·66·여)씨는 “산불이 꺼졌다가 다시 재발되곤 해 밭에 세간을 내놓았다 들여놓았다를 반복했다”며 “몸과 마음이 다 지친 상태여서 투표하러 갈 마음도 없다”고 말했다.

한편 시 선관위는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린 산불피해지역 투표자를 위해 읍면동사무소에서 보관중인 주민등록 원본을 가져올 경우 투표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또 차량 15대를 지원해 피해지역 주민들의 투표를 도왔다.

<동해·삼척〓경인수·이명건기자>sunghy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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