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광고로 본 東亞80년]근현대사 한국경제사 窓

  • 입력 2000년 3월 28일 20시 01분


동아일보 지면에는 두 개의 ‘창’이 있다. 윗부분에 자리잡은 기사는 당대의 표정을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창문이다. 그 기사 아래에 때론 기사와 마주보듯, 때론 기사와 화답하듯 앉아있는 광고는 또 다른 방식으로 시대의 표정을 전하는 창이자 역사였다. 창간 이후 동아일보 지면 하단을 거쳐간 수많은 상품 혹은 기업들. 그 면면과 그 명멸을 더듬다 보면 어느새 근현대 한국 기업사, 나아가 경제사가 파노라마처럼 그려진다.

▼日帝 수탈기▼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역사는 광고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광고면의 주인은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 일본기업이었다. 조선은 일본의 자본에 예속된 ‘소비시장’ 역할에 머물러야 했다. 일본 회사들은 1905년 총독부가 들어선 이후 절대적인 비호를 받으면서 조선경제를 수탈하며 이미 상당히 성장해 있었다. 특히 일본 상품은 25년부터 본격적으로 늘어나 광고비율은 23년 국내광고가 64, 일본광고가 36이었으나 30년에는 국내 36, 일본 64로 역전됐다.

28년 아지노모도 조미료 광고가 영국 미국 프랑스 전매특허에다 “이(李) 왕가에서도 사용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을 보면 일본 제품의 한국점령이 어느 수준인지 짐작이 간다.

민족기업으로는 경성방직 동아부인상회 화평당 화신 천일제약 경성전기 등이 겨우 자존심을 세워준 정도였다. 광고문안도 총독부의 간섭을 받았다. 일본이 외국이라는 인상을 주거나 조선을 독립국가로 표현하는 듯한 문구는 금지됐다.

그러나 이런 감시 하에서도 ‘민족’ ‘동포’를 우회적으로 내세운 광고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이런 ‘꼿꼿한’ 광고들은 동아일보의 ‘꼿꼿한’기사와 잘 어울렸다.

36년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제패를 잽싸게 광고에 이용한 것은 지금 봐도 손색이 없는 기민한 상술이다. 36년 8월 21일자에는 ‘약진 조선, 세계 1위 마라손 왕 손 만세. 마라손의 왕국 조선의 건아. 우리들도 자양의 과자 모리나가 카라멜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나 선배의 뒤를 이읍시다’라고 표현했지만 광고주가 일본 기업인 모리나가라는 점이 씁쓸하다.

▼광복후 70년대까지▼

동아일보는 40년 폐간됐다 광복 후인 45년 11월 복간됐다. 하지만 복간호에 광고를 실을 기업은 거의 없었다. 타블로이드판으로 발행된 복간호에는 겨우 태창직물과 화신의 이름만이 있는 광고만 실렸다. 그나마 다른 신문들은 광고 없이 나갔다. 그게 당시 우리 경제의 비참한 현실이었다.

광고는 수도 적었을 뿐만 아니라 크기도 보잘것 없었다. 5단 광고는 당시 서민들의 거의 유일한 오락수단이던 영화 광고 외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카피도 일제 강점기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고 한문도 남발했다.

‘斯界의 왕자 럭키사이다’ ‘逐(드디어)! 발매개시’ 등 지금으로선 생경한 표현들이 눈에 띈다.

차츰 해태 동아제약 오비 유한양행 진로 럭키 등 오늘날 대기업으로 성장한 회사들의 광고가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전쟁 후 ‘후진국형 질병’이 많은 때라 자연 의약품 광고가 넘쳐났다. 처음에는 수입의약품 광고가 주류를 이뤘으나 점차 국산 약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어 한국산 식품도 하나둘씩 출현했다.

‘샘표 간장, 가정주부에 희소식’(52년),‘국산 크라운맥주를 애용하고 외래맥주를 단연배격합시다’(53), ‘무궁화표 별표 국수, 최고 원료 깨끗한 시설 대규모 생산, 끈기좋은 국수로 단연 제일’(57년) 등의 소박한 표현이 정겹다.

대한항공이 ‘미국행 노선에 취항’(53)을 알린 것이나 ‘드디어 출현, 금성 라듸오’(59) 등은 당시로선 ‘사건’이었다.

60년대로 접어들면서 광고는 하나의 ‘산업’으로 본격 성장한다. 특히 선풍기 냉장고 등 가전품이 등장하면서 광고면은 북적거렸다.

‘시발자동차, 국산차 생산’ ‘기아산업의 삼륜자동차 개발’ 등의 희소식을 담은 광고들은 한국경제가 본격성장궤도에 접어들고 있음을 상징했다.

70년대 들어 광고면의 얼굴은 매우 다양해진다. 주도권은 의약에서 점차 식품 가전부문으로 넘어갔다. 가전제품의 대형광고전, 미원과 미풍의 조미료 광고전은 신문의 하단을 뜨겁게 달구었다.

이때는 또 기업 이미지 광고가 시작된 때이기도 하다. 삼성과 대우 럭키금성 등이 제품광고뿐만 아니라 기업 자체를 알리는 광고를 내보냈다. 이는 바로 ‘재벌’의 형성을 의미했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구가하던 시기의 낙관론이 광고면에도 넘쳐났다.

▼80년대이후▼

80년대 들어서도 70년대의 여세를 타고 광고시장은 폭발적으로 커졌다. 제약 화장품 세제 자동차 컴퓨터 보험 금융업 서비스 오락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로 광고시장이 확대됐다. 경제가 선진화되고 삶의 질과 여가를 중시하면서 운수업 관광 여행 문화 오락산업과 서비스 오락업종이 신문 하단의 새로운 얼굴로 등장했다.

88올림픽을 치르고 난 90년대에는 형형색색으로 치장한 컬러광고가 신문 하단을 요란하게 장식했다. 그 현란한 컬러처럼 한국경제가 온통 장밋빛 일색으로 보이던 시절이었다.

한편으로는 표현의 자유화를 타고 금기를 깨는 파격적인 광고가 속속 나왔다. 94년 2월 에바스 화장품의 밀크샴바드 나체광고 등 특히 누드를 실은 광고는 뜨거운 논란과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기업간에 시장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광고전은 사활을 건 싸움을 벌였다. 94년 조선맥주의 하이트, OB의 아이스, 진로의 카스가 펼친 3파전은 90년대 한국기업들의 특징이었던 풍요와 윤택, 그리고 ‘위태로운 자기과신’을 상징했다.

그 자기과신은 끝내 엄청난 고통을 불러왔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가 몰고온 태풍은 신문 상단의 우울한 뉴스와 함께 하단을 더할나위없이 초라한 몰골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2000년. 옛 ‘상처’를 뒤로 하고 한국경제의 새 희망으로 떠오른 젊은 힘인 벤처기업들과 정보통신광고들이 동아일보 하단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고 있다.

<이명재·홍석민기자> mjlee@donga.com

▼광고사태▼

74년 12월 중순부터 동아일보의 광고주들이 이유없이 광고를 해약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12월 26일에는 4, 5면의 광고란이 백지로, 8면의 광고면에는 광고 대신 동아방송 프로그램으로 메워 나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동아일보 광고 사태. 세계 언론 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사건’이 시작된 것이다. 이날부터 기업체 등 대 광고주들의 광고는 완전히 끊겼다. 75년 1월 25일 동아일보는 이 사태에 대해 “동아일보 및 동아방송에 대한 광고 탄압은 74년 12월 중순께 모기관의 지시에 따라 행정부의 관련 부처 당국자들이 각 부처 소관별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각 기업체 책임자들을 불러 동아일보 및 동아방송에 광고를 내지 말도록 압력을 넣음으로써 시작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유신헌법 철폐와 민주 회복을 부르짖었던 야당과 각계의 움직임을 여과없이 낱낱이 보도한 데 대한 정권의 보복이었다. 한달만에 상품 광고의 98%가 떨어져 나갔고 구독료만으로 신문을 운영해야 하는 비상상황에 직면했다.

그러나 자유 언론에 목마른 독자들은 이 사태를 방관하지 않았다. 1월부터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비롯해 각계 인사들과 국내외 독자로부터 격려 광고가 답지한 것. “배운대로 실행 못해 부끄럽다”는 대학생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여백을 산다”는 어느 밥집 아줌마까지, 동아일보의 광고면은 날마다 빽빽하게 채워졌다.

다음해 7월까지 총 1만건이 넘는 격려 광고가 몰려 동아일보를 구하기 위한 민주시민의 용기를 역사속에 기록했다.

▼만보사 설립▼

동아일보는 국내 신문사 가운데 처음으로 광고의 중요성을 인식, 광고대행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68년 9월 어느날. 김상만(金相万) 당시 동아일보 부사장은 박두병(朴斗秉·전 두산그룹 회장)합동통신회장과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됐다.

“광고대행업을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운영은 잘 되십니까?”

김부사장이 박회장에게 넌지시 물었다. 당시 합동통신은 광고대행 업무를 갓 시작한 상태.

“사실은 저도 광고대행업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회장이 선수를 치셨더군요.” 김부사장의 말에 박회장은 “지금 우리나라에는 좋은 광고대행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라며 의기투합했다. 비행기 안에서의 대화가 씨가 되어 두 사람은 각각 50%씩 출자해 새로운 광고대행사인 ‘만보사’를 설립키로 합의했다.

그해 11월 고재욱(高在旭)동아일보사장, 김상만동아일보부사장, 김상기(金相琪)동아방송국장, 박두병회장, 이원경(李源京)합동통신사장 등이 발기인이 돼 만보사의 창립총회를 열었고 이듬해인 69년 1월 정식 발족했다. 만보사는 언론기관이 만든 광고사답게 ‘투자에 대한 이익보다 한국 경제 사회 발전에 기여한다’는 설립 목적을 실천에 옮겼다.

6000만원의 자본금으로 시작한 만보사는 한양식품(코카콜라) 등 대형 광고주의 광고를 대행하며 단시간 내 급부상했다. 71년에는 코카콜라 루프트한자 중국(대만)항공 CPA항공 그레이하운드 등의 외국 기업과 삼양사 동일방직 호남전기 한려개발 동방유량 등이 만보사에 광고를 맡겼다. 73년의 취급액은 4억5300만원 가량.

만보사는 75년 합동통신 광고기획실과 합병, 현재의 오리콤으로 다시 태어났다.

<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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