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태풍 시민파워]'말없는 多數'가 움직인다

  • 입력 2000년 1월 25일 20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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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권자들이 확 달라지고 있다. 그동안 정치와 선거에 냉소적이었던 시민들의 태도가 적극적인 참여로 바뀌면서 이번 총선에서 뭔가 일을 낼 분위기다.

이 변화의 바람을 가장 먼저 피부로 느끼는 곳은 시민단체들. ‘2000년 총선시민연대’가 ‘공천반대 인사 명단’을 발표한 24일 총선연대의 홈페이지엔 시민들의 격려편지가 쇄도했다. 발표 직후부터 하루 사이에 들어온 격려 E메일은 무려 9만여통. 25일 총선연대 사무실은 시민들의 격려전화로 10여대의 전화기에 불이 날 정도였다.

이런 폭발적인 반응은 일부 ‘열혈 시민’들만의 것이 아니다. 일반시민을 상대로 실시된 한 조사를 보면 공천반대자 명단에 포함된 인사가 출마할 경우 찍지 않겠다는 응답이 무려 84.5%였다.

물론 투표장에서 마음이 어떻게 달라질지 현재로선 알 길이 없지만 얼음장 밑의 장강(長江)처럼 ‘말없는 다수’가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인 것은 분명하다.

시민들의 변화는 단순히 의식과 태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낙천 낙선운동을 돕겠다는 시민들이 총선연대 등 시민단체에 200∼300명씩 줄을 잇고 있다. 24일까지 최근 열흘새 총선연대에 들어온 후원금은 4521만여원. 환경단체들이 ‘동강살리기’운동을 벌이던 2년에 걸쳐 모인 후원금 5000만원과 맞먹는다. 단순한 지지와 공감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자신의 힘으로 직접 정치와 선거의 풍토를 바꾸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참여의 폭도 달라졌다. 예전의 시민운동이 ‘지식인들의 잔치’에 불과했다면 이번 ‘100인 유권자위원회’에는 주부가 33%나 자원했다. 후원금을 내는 시민도 초등학생부터 70대 노인까지 다양하다. 유권자 심판운동이 ‘엘리트 운동’이 아닌 ‘대중운동’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총선연대 김타균(金他均)공보국장은 “지난해 특검제 촉구 때도 100여 시민단체가 캠페인을 벌였지만 그 범위와 열기는 이번과 판이했다”며 “우리도 예상외의 시민호응에 놀라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시민들을 폭발적으로 움직이는 동인(動因)은 뭘까. 학계에서는 독재가 사라지고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뤄졌지만 아직까지 전혀 바뀌지 않고 있는 기존정치에 대한 환멸을 가장 먼저 꼽는다. 부패 무능 저질 정치인을 먼저 청산하지 않고는 사회적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공감대가 시민들 사이에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일각에선 ‘87년 6월항쟁’에 이은 ‘제2의 시민혁명’을 점치기도 한다. 낙천운동에 대한 지지열기가 고스란히 4·13총선으로 이어져 ‘선거혁명’이 실현될 수도 있다는 기대다.

그러나 87년과는 사회적 배경과 사안의 성격이 다르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독재 대 반독재의 간명한 구도였던 87년과 달리 이번 ‘유권자 심판운동’은 ‘같은 동네의 선량’을 심판하는 일인데다 지역색 금권선거 등이 재현될 경우 현재의 열기와 공감대가 투표로 연결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부산 울산을 포함한 경남지역에는 “지역구 공천반대자 58명 가운데 왜 우리 지역만 18명이나 되느냐”는 식의 반발정서도 표출되고 있다. 따라서 낙천 낙선운동의 열기가 투표행위를 포함해 전반적인 선거혁명에 이르기 위해서는 시민단체의 정밀한 프로그램 등 지난(至難)한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연세대 장동진(張東振·정치외교학)교수는 “낙천운동의 기본취지와 달리 지역색이 강한 영호남과 충청지역의 낙선운동은 효과를 거두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운동은 기존 정치와 선거문화를 개혁하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선거혁명’은 이제 막 시동을 건 단계다.

<하종대·이헌진·선대인기자>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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