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이진영/우울한 자화상

  • 입력 1998년 1월 8일 20시 42분


사재기 하는 소비자, 물건값을 좌지우지하는 도매상, 호시탐탐 금고를 노리는 도둑들…. 서울 중랑구 면목2동에서 슈퍼마켓을 경영하는 김완수(金完洙·39)씨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다. “오늘은 분유였습니다. 분유값이 오른다는 뉴스를 듣고 몰려온 손님들로 40평 규모의 가게가 하루종일 북적거렸습니다. 7일 오전에 이미 동나 지금까지 분유를 사러온 손님을 빈손으로 돌려보내느라 애를 먹다 들어오는 길입니다.” 김씨는 일과가 끝난 8일 새벽 본사에 전화를 걸어 국제통화기금(IMF) 시대에 가게주인이 얼마나 고달프게 살고 있는지를 넋두리처럼 전했다. “지난해 12월부터 계속 이 모양입니다. 밀가루 설탕 라면 화장지…. 판매량을 통제해도 소용없어요. 한 집에서 할머니 손자 손녀 며느리가 차례로 와 사가거든요.” 생전 처음보는 손님이 물건을 달라는 경우도 있다. 자기네 동네 가게에서 품절돼 옆동네로 건너온 사람들이다. “돈주고도 못사는 사람은 소비자뿐만이 아닙니다. 저도 대리점에서 물건을 떼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대리점에서 직접 물건을 가져다 주었다. 지금은 김씨가 차를 몰고 대리점 앞에서 한참 줄을 서도 빈차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수년 동안 거래해온 사이지만 외상은 어림도 없다. 반드시 현금이어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없던 도둑들마저 설친다. 인근 슈퍼마켓 두곳은 벌써 털렸다는 소식. 퇴근 무렵 가게문을 단단히 잠근 뒤 가게주위를 순찰하는 것이 일과가 돼버렸다. 무엇보다도 김씨를 지치게 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불신이다. “IMF가 오늘 내일로 끝나지 않을텐데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언론에서 제발 그러지들 말라고 좀 해주세요.” 〈이진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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