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이영원/허울좋은 퇴직자 재취업

  • 입력 1997년 8월 12일 08시 16분


올해 65세로 초등학교 교사 정년퇴직을 한뒤 쉬고 있었다. 어느날 「공사직 퇴직자 우대 고소득 보장 일당지급」이란 광고를 보고 찾아갔다. 회사이름이 영어로 돼있어 외국계 회사인듯 했으나 외제 정수기와 공기정화기를 수입 판매하는 회사였다. 대부분 60대의 군인 경찰 교사 등 전직 공무원이나 회사원들이었다. 전문직에 오래 종사했으나 사회물정은 어둡고 더구나 영업은 생소한 분야라 오전중 한두시간씩 교육을 받았다. 한시간 쯤은 보건체조와 춤 등으로 몸을 풀고 신바람을 일으킨 뒤 곧이어 전날 판매실적이 있는 직원에 대한 축하 케이크 전달식을 갖는다. 판매실적을 올린 사람은 대부분 자신이 구매하거나 자식 등 친인척에게 판매를 했다고 한다. 판매교육을 지도하는 간부도 제일 먼저 자녀에게 팔고 두번째는 근무하던 직장의 후배에게 판매하라고 가르친다. 안면으로 맡기라는 것이다. 아침에 출근하면 음료수도 한잔 주고 영업을 하러 나갈때 지사장이하 직원들이 복도에 도열해서 박수를 치고 허리굽혀 배웅을 하니 도저히 미안해서 판매에 열을 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판매실적이 없으면 일당은 물론 급여도 없다. 며칠을 공치다가 하는 수 없이 아내와 상의도 없이 외제 정수기를 덜컥 할부로 구입하고 말았다. 그때야 비로소 제살 제가 깎아 먹기로 수당이 지급되는 것이었다. 도대체 우리나라 실정에 2백20만원짜리 정수기가 무슨 소용이 있고 3백만원짜리 공기정화기가 꼭 필요한가. 그것도 수시로 고액을 들여 필터교환을 해야 하는데 말이다. 내가 산 정수기의 월부를 갚으려니 자식들에게도 권유, 수백만원의 부담을 안기고 친척들에게도 낯두꺼운 안면판매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나라 노인뿐 아니라 정년 및 명예 퇴직자들의 재취업 실태라고 생각하니 한심하다. 이들을 이용한 과소비 조장으로 사회는 병들고 무리한 안면외판으로 요즘 사회에는 대인기피 현상과 가정불화 현상까지 빚어지고 있다고 한다. 노인의 경륜을 활용하는 좀더 건전하고 보람있는 일자리는 없을까. 이영원(대구 동구 신암5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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