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의 자유기업센터가 정치자금실명제 도입과 떡값 폐지를 강력히 주장한 지난 16일. 한 대그룹의 대외정보담당 간부는 대통령선거 주자 가운데 한 사람이 수일전 참석했던 골프회동의 「막후」를 파악하느라 바빴다. 나름의 정보망을 가동해 확인한 내용을 담은 보고서는 그룹 「윗분」들께 올려졌다. 「Z그룹 계열사의 최고경영자가 주선했으며 그 대선 주자의 고교동문인 Y씨 P씨 등 유력 정계인물과 모 언론사 경영자가 참석. 골프가 끝난 뒤 만찬」.
올 대선이 한 발 한 발 다가오면서 국내 주요그룹 정보담당자들의 촉각도 나날이 곤두서고 있다.
『金泳三(김영삼) 金大中(김대중) 두 김씨와 鄭周永(정주영) 朴燦鍾(박찬종)후보가 격돌했던 92년엔 그나마 편했습니다. 이번엔 김대중 金鍾泌(김종필) 두 김씨에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용(龍)들이 난립하니 어느쪽에 걸어야 할지, 어느쪽을 더 챙겨야 할지 곤혹스럽습니다』(모그룹 정보담당 간부)
대선 도전을 표명한 인물도 많은 데다 선거전 양상이 복잡하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각 그룹이 대선 주자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진짜 용」의 향배가 기업의 앞날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신규사업 진출, 국내외 자금차입, 대형 프로젝트수주 등 그룹의 운명을 좌우할 정책방향이 권력의 손바닥에 놓여있는 마당에 자칫 헛짚었다가는 피곤한 처지가 될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에 어느쪽에 얼마만큼 보험을 들지 고민이라는 것.
대그룹들이 그룹 차원에서 인물 데이터베이스를 구축, 정관계 로비에 활용해 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요즘은 대선 주자들의 개인신상과 정책성향 등이 세밀하게 분석된다. 그 내용은 각 주자와 학연 지연 등이 닿는 그룹내 임직원들을 가려뽑는데 일차적으로 활용되고 「상황」이 생기면 즉시 연고가 있는 임직원을 「적재적소」에 가동한다.
「상황」이란 특정 정치인의 후원회 행사, 출판기념회, 자녀 결혼식 등.
『그룹내에는 지난 대선때와 마찬가지로 주자 누구와 모종의 인연이 있다는 것을 은연중 과시하는 간부들이 심심찮게 나서고 있습니다. 요긴할 때 자신을 「활용」해 달라는 무언의 청탁이자 존재 과시라고나 할까요』(L그룹 부장)
정경유착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61년 5.16 직후부터다. 이 시기엔 차관을 특정기업에 배정해주고 받는 일정액의 리베이트가 정치자금으로 전용됐다. 경제규모가 커진 80년대엔 정치권력이 특정기업을 포괄적으로 비호해주는 대가로 대통령이 직접 거액의 자금을 수수하는 형식으로 발전했다. 이를 전직대통령들은 「통치자금」이라고 강변했다.
全斗煥(전두환) 정권 시절 정치권에 밉보인, 이른바 「괘씸죄」가 겹쳐 한순간에 공중분해된 국제그룹의 사례가 청와대와 재계의 총체적인 유착관계를 심화시켰다.
『80년대까지는 정부가 앞장서서 경제를 이끌었던 만큼 정경유착은 어느 정도 필요악(必要惡)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제구조가 복잡해지고 규모가 엄청나게 커진 지금의 정경유착과 이에 따른 부정 비리는 기업활동과 국가경제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아닐까요』(D그룹 이사)
최근들어 대기업들은 정경유착이란 용어에 유달리 알레르기 반응이다. 어디까지나 피해자란 항변이다.
『이권보다는 정치권의 요청에 따라 마지못해 돈을 건네는 게 대부분입니다. 「보험」을 드는 거죠. 정경유착이란 표현은 적당하지 않습니다』(S그룹 이사)
그러나 징역 20년을 구형받은 鄭泰守(정태수)한보그룹 총회장이 엮어온 정경커넥션이나 金賢哲(김현철)씨 비리는 김영삼 정권하의 정경유착이 구체적인 이권과 검은 돈을 주고받는 「거래형」이자 액수도 엄청나게 큰 「치부형」으로 구태가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정부가 금융수단과 신사업인허가권 등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는 기업들이 공정경쟁보다 「연줄동원」에 더 매력을 느끼게 되죠. 정부의 규제 정도와 정경유착은 비례관계입니다』(D그룹 이사) L건설의 모부장은 『아직도 하청업체에 가짜영수증을 끊어주고 비자금을 조성하곤 한다』면서 『대선 주자가 2,3명으로 압축되면 지금 여러 후보에게 뿌리는 「푼돈」은 「목돈」으로 달라질 것』이라고 관측했다.
다만 기업들은 한보스캔들을 계기로 정경유착 관행이 다소 수그러질 것이라는 전망을 하고 있다.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으려는 재계와 사회단체들의 움직임이 여느 때보다 활발한 것도 희망적이다.
경제정의실천 시민운동연합의 高桂鉉(고계현)정책연구부장은 『우리 사회의 뇌물사슬은 정치권의 과도한 자금수요에서 비롯되는 만큼 정치자금을 공개적으로 모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하고 『오는 6월 임시국회에서 정치자금실명제 등이 확립되지 않으면 대선자금의 망령은 다음 정권에도 따라다닐 것이 확실하다』고 우려했다.
〈박내정기자〉
―5부 「기업병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