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비수첩으로 본 행적]도주중 3군사령부 촬영

  • 입력 1996년 11월 7일 20시 35분


지난 5일 사살된 북한무장간첩 공작조(정찰조)2명이 동해안 침투이후 사살되기 전까지 49일간의 도주행적을 적은 수첩이 발견돼 이들의 도주경로가 드러났다. 합동참모본부는 7일 이 수첩의 메모 가운데 기밀사항을 제외한 내용을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공작조(당시 3명·9월19일 조장사살)는 지난 9월15일 잠수함을 타고 강릉 해안에 도착, 육상침투에 성공했으나 9월18일 0시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던 중 잠수함이 좌초하자 육지에 상륙했다. 수첩에는 「9월18일 오전 1시30분 잠수함 폭파, 정찰조 3명이 2개조로 분산이동」이라고 적혀 침투간첩들은 잠수함이 좌초하자 침투흔적을 없애기 위해 선체를 폭파하려 했으나 화재만 일으키고 실패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어 「9월21일 오전 9시30분 적 1명 사살」이라고 적혀있다. 잠수함이 좌초한 뒤 강릉해안 괘방산을 거쳐 3일만에 칠성산으로 은신한 공작조가 사살한 사람은 칠성산 망기봉에서 전사한 특전사소속 李炳熙중사다. 공작조는 9월21일부터 10월2일까지의 행적에 대해서는 「주로 주간에 산능선이나 도로 및 소로(오솔길)로 이동해 무 잣 도토리 등 산열매나 농작물 등을 취식했다」고 기록했다. 이들은 10여일의 이 기간동안 자세한 메모를 남기지 못했으며 이는 겹겹이 쳐진 아군포위망을 뚫기 위해 안간힘을 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수첩에는 「10월 3일 용평스키장 오락장부근 숙영」 「10월 7일 월정초등학교 자연정화소 숙영」이라는 기록도 있다. 도주과정에서 민가의 지근(至近)거리까지 접근하는 대담함을 보인 것. 이는 10월 2일 북한의 대남보복위협이후 소탕작전에 동원됐던 아군병력을 대거 정상위치로 돌려보내면서 포위망이 뚫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수색망을 피해 서남쪽으로 도주하다 칠성산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바꾼 뒤 영동고속도로를 통해 대관령에 잠입하고 오대산 월정사 부근의 진고개를 통과했다. 수첩에는 「10월8일 오후 2시20분 도로를 따라 산으로 오르다 주민 3명을 처단」했다고 적혀있다. 오대산 자락인 평창군 진부면 탑동리 재미재 중턱에서 버섯을 채취하던 민간인 金龍洙씨 등 3명을 살해한 것이 바로 이들이었음을 확인해주는 내용이다. 이들은 민간인을 살해한 뒤 빠른 속도로 홍천 계방산을 거쳐 인제 방태산을 넘었다. 공작조의 다음 행적은 「10월 12일 산정점에서 3군단사령부 촬영」이라는 부분에서 드러난다. 이들은 도주중에도 아군부대를 촬영한 것. 이후 이들은 10월14, 15일 연이틀동안 민가를 침입했던 것으로 적혀있어 군포위망이 얼마나 허술했는가를 드러냈다. 「10월16일 도로통과중 민간인이 탄 차량에 적발돼 적의 추격을 받음. 저수지를 건너 이동」이라는 메모는 아군이 민간인 신고를 귀담아 듣지않아 공작조 소탕기회를 놓쳤음을 의미한다. 이날 오후 5시20분경 인제군 남면 남전리 가로리고개에서 차를 타고 지나가던 趙백송씨가 44번국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재빠르게 뛰어 절벽밑으로 피신하는 거동수상자 2명을 발견, 신고했던 것. 공작조는 다음 행적을 「10월19일 양구대교에 도착. 경계 때문에 건너지못하고 민가침입」이라고 적었다. 이들은 趙씨에게 노출된 뒤 갈수기를 맞아 수심이 1m정도로 얕아진 소양호를 가로질러 양구지역으로 잠입한 뒤 민가에 내려가 쌀 고기 등을 훔쳐 끼니를 해결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어지는 메모는 「10월22일 적 운전병 조우, 처단」이다. 공작조가 양구군 남면 두무리에서 싸리나무를 베던 表종욱일병과 마주치자 그를 교살, 군복을 빼앗아 입고 달아났다는 군당국의 조사내용과 일치한다. 이들은 그 후 양구군 최대교량인 광치대교를 건너 북동진, 향로봉 자락인 인제군 북면 용대리까지 갔다가 사살됐다.〈黃有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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