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 전문가로 변신한 북한 여성 돌격대원[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12일 14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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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한국에 입국한 뒤 피부 관리샵을 운영하고 있는 김연희 씨.
2009년 한국에 입국한 뒤 피부 관리샵을 운영하고 있는 김연희 씨.

2000년 10월 평양과 남포 사이 42㎞ 구간에 왕복 10차선의 청년영웅도로가 건설됐다. 북한은 이 도로를 ‘위대한 장군님 시대의 청춘 서사시’라고 찬양했다. 북한은 약 2년 동안 10만 명이 넘는 청년들이 동원돼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인력만으로 완공한 고속도로’라며 격찬했다.

도로가 완성된 지 한 달 뒤 김정일은 현장을 둘러보고 “청년영웅도로는 우리 당의 청년 중시 사상이 낳은 위대한 창조물이다”라는 장문의 담화를 발표했다. 일부만 언급하면 이렇다.

“청년들이 이 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강성대국 건설의 대통로라고 하였다는데 그럴 만합니다. 이렇게 넓고 시원한 고속도로는 세계적으로도 드물 것입니다. 청년영웅도로는 우리 당의 청년 중시 사상이 낳은 위대한 창조물입니다. 당의 청년 중시 사상은 청년들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 당은 언제나 청년들을 귀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청년들을 믿고 내세워 어려운 과업들을 수행해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당은 고속도로공사 전 기간 여기에 깊은 관심을 쏟았으며 청년 건설자들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다니는 차도 거의 없고, 관리도 안 돼 여기저기 패인 이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노예노동을 강요 당했던 청년 중에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나서 자란 16세 김연희(가명)도 있었다.

피부 관리에 전념하고 있는 김 씨. 2017년 대학에 입학해 실습을 받을 때 사진이다.


● 2000년 청년영웅도로

김 씨는 2000년 3월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동료 2명과 함께 이 도로 공사장에 차출됐다.
그가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열차를 타고 10여일 만에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가 소속된 중대는 100명 정원 중 33명만 남아 있었다. 자고 나면 도주자가 속출했다. 남아있는 사람들도 눈이 휑하게 들어간 채로 넋이 나간 표정들이었다.

냉기가 그대로 들어오는 흙벽돌로 쌓은 임시 숙소에서 잠이 들자마자 기상소리가 울렸다. 그날부터 그는 새벽 5시30분에 일을 시작해 저녁 6시까지 흙 마대를 날랐다. 이틀에 한 번씩은 야간작업이라며 1시까지 일했다.

100㎏짜리 마대에 흙을 담은 뒤 두 명이 번쩍 들어 김 씨의 어깨에 얹어주면 수십m 떨어진 도로까지 가서 퍼부어야 했다. 흙이 쌓이면 큰 망치를 들고 땅을 내리쳐 다졌다.

이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일을 시키면서도 하루 식사 정량은 400g에 불과했다. 집에서 옥수수를 볶아 넣어간 주머니는 한 알, 한 알 세면서 먹었어도 금방 바닥이 났다.

겨울에는 추워서 고생했고, 여름엔 모기에 뜯기며 더워서 고생했다. 샤워실도 없었다. 며칠에 한 번씩 어둑어둑해지면 인근 저수지에 사람들을 인솔해 간 뒤 씻으라고 했다. 이쪽엔 여성들이, 건너편엔 남자들이 단체로 들어가 씻고 나왔다. 김 씨는 너무 굶주리면 부끄러움 따위는 없어진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다. 호수에 들어간 누구나 머리 속에 먹을 생각만 가득할 뿐 이성에 대해 관심도 없었다.

공사장엔 사고도 잦았다. 그의 작업장에서도 한꺼번에 7명이 차에 치여 죽은 대형 사고도 발생했다. 실제 북한은 나중에 도로 건설과정에 수많은 인명 피해가 났음을 직간접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그래도 무서워 도망갈 생각도 못했다. 허약해져 겨우 걸을 수 있는 상태에서 도망을 쳐봐야 얼마 안 돼 잡힐 것이다. 지휘관들이 사람들 앞에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때렸다. 매 맞는 도주자들의 비명이 도로 공사장 어디에서나 매일 터져 나왔지만, 그럼에도 살려면 도망쳐야 했다. 얼마쯤 지나니 그와 함께 차출돼 온 공장 동료 2명도 보이지 않았다. 도주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어두운 하늘을 쳐다보며 한탄했다.

“난 왜 태어났을까?”

다행히 그는 2개월 뒤 중대 식당 식모로 발령이 났다. 식모들도 다 달아나니 밥을 지을 여성이 부족했던 것이다.

밥을 짓는 일이다보니 배고픔에선 일단 벗어났다. 금방 원망하던 마음이 달라졌다.
“집에서 배곯는 것보다 여기서 일하는 게 차라리 낫구나.”

지난해 1월 뷰티코디디자인전시회장을 찾은 김 씨가 전시물을 살펴보고 있다.


● 1990년대 고향

김 씨는 태어나서 배고픈 기억밖에 없었다. 그는 13살 때부터 고향에서 빵 장사를 시작했다. 빵을 만드는 집에서 외상으로 받아와 팔면 얼마쯤 남았다. 그것으로 자기 배를 채우기도 버거웠지만 학교를 다니며 굶주리는 것보단 나았다.

그가 태어난 고향은 두만강 국경도시인 함북 회령 시내에서 걸어서 3시간쯤 떨어진 농촌마을이었다. 탈북민들에게 악명 높은 ‘전거리교화소’가 걸어서 3시간쯤 거리에 있었다.

김 씨가 1984년에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광산 광부였다. 김 씨가 인민학교 4학년 때인 1995년 고난의 행군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가정의 생계는 어머니가 책임졌다. 산에 올라가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지만, 절반은 도둑을 맞고 절반만 겨우 건져오면 다행이었다. 집도 세 번이나 도둑을 맞아 건질 것이 없었다.

그는 학교에 가면 12개 과목을 공책 한 권에 받아 적었다. 책 살 돈도 없었다. 그렇게라도 학교에 나오면 다행이었다. 학교에 오는 학생들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어요. 한 번은 부엌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어요. 아버지가 쥐가 들어온 줄 알고 어둠 속에 파리채를 들고 나가 휘둘렀는데, 등잔을 켜고 보니 앞집에 살던 6살짜리 아이가 들어와 밥을 훔쳐 먹고 있었어요. 그런데 너무 영양실조가 심하니까 울지도 못하는 겁니다. 감자밥이라도 먹여서 보냈는데 이틀 뒤에 죽었어요.”

김 씨의 집도 가난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버지가 고향이 중국이어서 연변에 친척들이 살았다는 것이다.

가난한 집안 형편을 견디다 못해 아버지는 1995년 몰래 중국에 건너가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서 왔다. 그러나 그걸로 밀린 빚을 갚고 나니 남는 것이 거의 없었다.

1997년 아버지가 다시 중국에 들어가려 할 때 13살 김 씨는 무조건 아버지와 함께 중국으로 가겠다고 졸랐다. 중국에 가면 며칠이라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딸이 안쓰러웠는지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두만강을 몰래 넘었다. 중국에 가서 닷 새 동안 머물며 난생 처음 행복하게 살았다.

연변에 사는 친척들은 가난했다. 김 씨 부녀가 나올 때 170위안을 모아 주었는데, 그걸 갖고 오다 그만 국경경비대에 체포됐다. 다행히 김 씨의 기지로 20위안만 빼앗기고 150위안은 숨길 수 있었다. 안전부에선 그래도 아이를 데리고 조국으로 돌아왔다며 큰 처벌을 하지 않았다. 150위안으로 빚을 갚고 나니 딱 한 끼만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시간은 흘러 그는 2000년 중학교를 졸업해 시멘트공장 노동자로 발령이 났다. 공장에 가자마자 고속도로 건설현장에 끌려가 6개월 동안 고생을 했고, 다시 공장으로 돌아왔다.

2017년 충북의 한 관광지를 찾은 김 씨가 가족과의 재회를 간절하게 소망하는 모습. 그러나 한국으로 그렇게도 데리고 오고 싶었던 부모는 끝내 북에서 세상을 떠났다.


● 2005년 두만강

김 씨는 공장에서 21세 때인 2005년까지 일하다가 다시 중국으로 몰래 건너갔다. 그가 중국에 간 동기는 어머니에게 치아를 해줄 돈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너무나 고생을 한 어머니는 이가 하나둘 빠지다가 이때쯤 남은 이가 없게 됐다. 음식을 씹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다 못해 그는 추운 겨울 두만강을 넘었다.

12월 말이 돼도 두만강은 가운데가 얼지 않았다. 몰래 강을 넘던 그는 중간쯤에서 물에 풍덩 빠졌다. 겨우 빠져나왔는데 옷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관절을 굽힐 수가 없으니 펭귄처럼 엉큼엉큼 움직여 겨우 중국에 갔다.

그렇게 찾아갔지만 중국 친척들에게선 도움을 거의 받을 수가 없었다. 며칠 뒤 다시 나오다가 또 강에 빠졌다. 기어서 북한 기슭에 도착했지만 지쳐서 얼음판 위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마침 순찰을 돌던 경비대가 그를 발견하고 업고 갔다. 북한에서 발견됐기에 큰 처벌을 면할 수 있었지만, 얻은 소득은 없었다.

집에서 얼마쯤 있다가 다시 중국으로 넘어갔다. 이번엔 중국에서 취직해 직접 돈을 벌려고 생각했다. 집에는 장사를 간다고 말하고 떠났다. 중국에서 일자리는 쉽게 생기지 않았다. 그때는 연변에서 탈북민들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고 있었고, 더구나 2008년 베이징 올림픽까지 앞둔 터라 경계도 삼엄했다.

그렇게 중국에서 제대로 된 직업도 못 구하고 친척집을 전전하는 가운데 세월이 하염없이 흘렀다. 친척의 친구 언니 집에 가서 아이를 봐주며 몇 달을 보내고 있을 때, 그 언니가 “그러지 말고 남친이라도 사귀라”며 한 남자를 소개해주었다.

그 남자는 자기 사무실에 와서 밥을 해주면 돈을 주겠다고 했다. 남자 사무실에는 컴퓨터 여러 대가 있었고 직원 여러 명이 상주했다. 드디어 컴퓨터 업종에 종사하는 남자를 만나 중국에서 자리를 잡나 싶어 기뻐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에 공안이 들이닥쳤다.

그는 뒷문으로 도망쳐 체포되진 않았지만, 남친을 포함해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이 다 잡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친의 직업은 보이스피싱범이었다. 그는 그때 처음 보이스피싱이라는 사기 수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김 씨는 중국에 있을 때 한국에 가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돈을 벌어 집에 돌아가 어머니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고, 치아를 해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공안의 추적을 받는 막다른 골목에 빠지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는 친구 언니가 소개한 한국의 탈북민 모임 사이트에 접속해 여기저기 도움 요청을 보냈다. 그렇게 연락한지 사흘 만에 브로커를 만나게 됐다. 브로커의 지시에 따라 다른 탈북민 16명과 함께 한국에 도착했던 때가 2009년 5월이었다.

김 씨는 2022년 대구가톨릭대학에서 뷰티 미용 관련 석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김 씨는 2022년 대구가톨릭대학에서 뷰티 미용 관련 석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 2009년 평택

인천공항에 내릴 때 그는 많이 무서웠다. 인솔자가 너무 무섭게 통제하다보니 “내가 납치당해 가는 것 아닌가”라는 두려움도 있었고, 공항에 내려서 기자회견을 할까봐 걱정도 됐다. 그때까지 그는 한국에 가면 무조건 기자들이 달라붙어 물어보는 줄 알았다. 그러면 고향에 있는 가족이 피해를 입을 것이라 우려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합동조사는 비교적 쉽게 끝났다. 그는 고향에서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와 있는 줄 몰랐다. 아는 사람이 많으면 조사는 비교적 빠르게 진행된다.

2009년은 탈북민들이 가장 많이 한국에 입국한 해이다. 베이징 올림픽 때문에 이동이 차단됐던 탈북민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그해에만 3000명 가까이 입국했다. 그가 하나원에 갔을 때 같은 기에 여성만 무려 245명이나 됐다. 하나원에선 매달 4만 원씩 용돈을 주었는데, 그는 사회에 나가면 돈이 없을 것을 우려해 먹고 싶은 것도 먹지 않고 악착같이 모았다.

그해 9월 그는 하나원을 나와 평택에 정착했다. 먼지가 뽀얀 임대주택을 청소하고 있을 때 브로커가 맨 먼저 찾아왔다. 그래도 그 브로커는 착한 사람이었다.

초기 정착금으로 300만 원이 나왔는데, 중국에서 맺은 브로커 비용 계약이 300만 원이었다. 브로커는 “내가 다 가져가면 먹고 살기 어려울 것”이라며 280만 원만 받아갔다.

20만 원으로 그의 첫 한국 정착이 시작됐다. 돈이 없어 초기 3개월은 먼저 한국에 온 친구가 준 옷을 입고 지냈다. 나흘 만에 그는 벼룩시장을 뒤져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휴대전화 부품에 땜을 하는 작업이었는데, 그는 섬세한 손놀림으로 금방 적응했다. 그런데 그 일자리에서도 텃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신입이 너무 빨리 컨베이어에 섰다”며 매일같이 온갖 구박을 하는 한 중년 여성 때문에 6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나왔다.

컴퓨터 학원을 다니며 엑셀 자격증을 따고 한 회사 경리로 입사했는데 이곳에서도 3개월을 버티지 못했다. 용어도 잘 모르는 그에게 산더미 같은 일감을 들이밀며 무작정 혼을 내는 부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웃 직장 경리가 매일 같이 산책로에 나와 우는 그에게 “이곳에서 버틴 사람이 없다”고 슬그머니 귀띔을 해주었다. 결국 그 일도 3개월 뒤 그만두었다.

일을 그만둘 때마다 앞길이 막막했지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힘들 때마다 그의 머리 속에선 13살 때 빵을 팔려 다니던 일, 16살 때 흙 마대를 메고 달리던 시절이 떠올랐다.

지난해 12월 지역 내 한 노인복지관에서 자원봉사로 어르신에게 아로마향 비누 만들기를 가르치는 김 씨.


● 2024년 예천

어느덧 14년이 흘렀다. 김 씨는 안동에 있는 경북도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예천군의 한 거리 도심에 피부 관리실을 운영하고 있다. 정성스럽게 서비스를 한다고 소문이 나 고객들도 많아졌다.

그는 이제 뷰티 전문가로서 한국 사회에 당당히 자리 잡았다. 거저 얻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2011년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오누이를 낳아 키우던 전업주부 시절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 집에서 마냥 놀고만 있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평생을 할 수 있는 직업을 수소문하다가 피부 미용을 선택했고, 이왕 시작하려면 제대로 배우고 시작하겠다는 결심으로 2017년부터 4년제 대학 과정을 마쳤다. 졸업 직후 피부관리실을 연 뒤에도 2년제 석사과정까지 내처 마쳤다. 석사과정을 마칠 때는 매주 3일을 왕복 3시간씩 차를 몰아 수업을 듣고 왔다.

“피부미용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5년 동안은 하루도 휴식한 날이 없었던 것 같아요. 매일 9시에 출근해 밤 11시까지 일했어요. 그렇게 열심히 살아 피부 관리실을 열면서 받았던 대출도 이미 다 갚았습니다. 요즘은 주변에서 하도 말려서 일요일엔 가끔 쉬긴 합니다.”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탈북민들은 보통 자신의 신분을 숨긴다. “북에서 온 사람이 잘하면 얼마나 잘 하겠냐”는 편견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일을 시작한 뒤로 자신의 고향을 숨긴 적이 없다.

“처음엔 저도 무시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더 잘해주려 노력하니 어느 순간부터 고객들도 인정하고, 다른 고객을 소개해 데려오기도 합니다. 한국은 노력한 것만큼 이룰 수 있는 사회라서 만족합니다.”

그는 요즘 사이버대를 또 다니고 있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다.

“사회가 고령화되면서 고령 인구가 늘고 있고, 노년에도 자기 관리의 중요성을 느끼는 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노인 피부 미용을 전문으로 하려는데, 그러자면 사회복지도 꼭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노인 피부 미용을 전문으로 하려는 것은 단순히 시장이 확대돼서만은 아니다.

“북에 사시던 부모님들이 다 돌아갔습니다. 돈을 벌어 어머니에게 치아를 해드리고, 맛있는 음식을 사드리려 탈북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제 마음 속에 평생의 한으로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 하지 못한 효도를 이제 부모님 또래의 어르신들에게 하고 싶습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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