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성분에 넘어졌던 북한 음악신동, 스카이차 위에 서다 [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주성하 기자 입력 2021-01-29 16:08수정 2021-01-29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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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었던 어둠과 방랑의 터널에서 벗어나 따스한 햇살이 가득한 삶의 행복을 찾은 조광호 일조스카이 대표. 조광호 대표 제공


# 정해진 운명
북한에서 그의 삶은 태어나기 전, 그러니까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꼬였다. 아니,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한반도의 가장 북쪽인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1974년 태어난 조광호 씨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비상한 소질을 보였다. 5살 때부터 아코디언과 바이올린 연주를 배웠고 주변 사람들에게서 음악 신동이란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인민학교(초등학교) 2학년 때 인재를 찾아 전국을 순회하던 평양음악대학 교수의 눈에 들었다. 교수는 평양에 가서 영재 교육을 받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입학통지서가 오지 않았다. 인민학교 4학년을 졸업했을 때는 도 소재지에 나가 예술인재 양성 교육기관인 예술학원 입학시험도 쳤다. 거기서도 합격이란 소리를 들었지만 역시 입학통지서는 날아오지 않았다. 이유도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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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자 온 가족이 이유를 찾기 위해 나섰다. 그렇잖아도 조 씨의 부친 역시 군 복무를 마치고 탄광 노동자로 배치돼 온 것이 석연찮았다.

몇 년을 연줄을 타고 애타게 알아보고 알아보다 드디어 원인을 밝혀냈다. 북에선 ‘토대’라고 말하는 출신성분이 걸린 것이다. 토대 문건은 노동당이나 보위부 등 일부 기관에서만 비밀리에 관리하기 때문에 일반 주민은 자신에게 따라다니는 문건을 볼 수가 없다. 그래도 대개는 자기가 왜 출신성분이 걸렸는지 짐작은 한다. 하지만 형이 6.25전쟁에 참전해 전사했다고 알고 있는 조광호 씨의 부친은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전사자 가족은 북에서 토대가 좋은 축에 들어간다.

출신성분을 관리하는 중앙당 간부에게 매달려 알아본 결과 발단은 6.25전쟁 때 양강도 갑산군에서 한 마을을 담당했던 절름발이 분주소(파출소) 주재원(보안원) 때문이었다. 형이 인민군에 입대한 뒤 전사했다는 소식이 날아오자 주재원은 새파란 나이에 과부가 된 형수에게 집적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치근거려도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그는 어느 날 “너는 앞으로 반동 집안으로 살게 될 거야”라고 저주를 퍼붓고 사라졌다.

주재원은 ‘주민요해문건’에 친척집에 놀러갔다 행불된 조 씨의 첫 번째 큰아버지는 ‘월남도주자’로, 전사한 둘째 큰아버지는 남쪽으로 도주한 것이 유력한 행방불명자로 기록했다.

1980년대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알게 된 뒤 조 씨 집안은 출신성분을 바로잡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전방에 주둔한 옛 부대를 다니며 큰 아버지와 함께 싸웠고 그가 전사했다는 것을 진술할 증언자를 찾아내는 등 열심히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그의 집안과 관련된 숱한 서류들을 다 검토하고 고쳐야 하는 시끄러움을 감수해 줄 간부는 없었다.

토대를 바꾸지 못하는 ‘음악신동’의 앞날은 뻔했다.

그나마 부모가 열심히 애를 쓴 덕분인지, 아니면 그 정도 토대로도 가능한 일인지 도무지 기준은 알 수는 없지만 조 씨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17세에 김정숙교원대학에 입학했다. 북한에는 중학교 교원은 사범대학에서, 인민학교 교원은 교원대학에서 양성한다.

여학생들만 가득한 교원대학에서 조 씨는 몇 안 되는 남학생으로 4년을 마치고 졸업했다.

1994년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인 온성군의 한 농촌 인민학교에 음악교사로 배치됐다. 농촌은 보통 인민학교와 고등중학교가 같은 건물을 쓴다. ‘고난의 행군’이 본격 시작도 되기 전인데 이미 그 학교엔 교사 정원이 턱없이 부족했다. 자격도 없는 할아버지를 불러 ‘도레미파’ 정도의 음계만 겨우 가르치는 정도였다.

조 씨는 학교에서 음악교사 역할은 물론, 미술교사, 역사교사, 국어교사까지 모두 담당해야 했다. 나중에 중학교 음악교사가 없어 중학교 음악 수업도 했다.

고난의 행군이 닥치자 농촌에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기 시작했다.

조 씨는 “마을에서 매일 1~2명씩 굶어 죽어갔고, 사람들은 시간만 나면 산에 올라가 부채마나 달맞이풀과 같은 중국에 팔릴만한 약초를 캤다”고 회상했다.

농촌에서 몇 년 버티다가 1998년 드디어 그나마 작은 도시라고 할만한 곳에 나왔다. 온성군 남양노동자구에 있는 남양인민학교 음악교사로 옮긴 것이다. 남양은 중국 옌벤(延邊)조선족자치구 투먼(圖們)과 마주한 도시로, 한국 언론에 종종 사진이 많이 등장하는 곳이다.

남양에 나온 뒤 조 씨는 중국을 매일 마주보며 살게 됐다. 당시 ‘교두’라고 불리는 남양세관 주변에는 ‘왜가리’들로 꽉 차 있었다. 왜가리는 중국에 친척을 둔 사람들이 국경에 와서 중국에 도와달라고 연락한 뒤 언제 짐이 넘어오나 중국 쪽을 왜가리처럼 목을 빼고 바라본다고 해서 붙어진 별칭이다. 거처할 곳이 변변치 않은 이들은 교두 주변에서 온실에서 쓰는 비닐을 쓰고 밤을 샌다. 다음날 국경다리를 통해 차가 나올 때마다 수백 명이 우르르 몰려가 자기 짐이 아닌지 확인하지만, 그들 중 흥분해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그래도 남양은 중국과의 교류가 있어 농촌마을보다 훨씬 잘 살았다. 이곳에서 그는 음악을 가르쳤고, 방과 후엔 바이올린 교습도 했다. 이때만 해도 그는 중국으로 탈북할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다. 이곳에서 결혼도 하고 애도 태어나니 가장의 의무에 묶였다.

2017년 추수감사절날 북에서 학생에게 가르치던 바이올린을 들고 오랜만에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하고 있다. 조광호 대표 제공.


# 탈북
2003년 다시 온성군 탄광마을의 중학교 음악교사로 임명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흔히 한국에선 2003년쯤엔 북한이 ‘고난의 행군’에서 벗어난 줄로 알고 있다. 하지만 당시 탄광마을은 여전히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학교에 가보니 학급 재적인원이 25명인데 매일 7~8명만 나와요. 선생이 가르치기보단 매일 학생 가정을 방문해 살아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과였어요. 막상 집에 가보면 학교에 나오란 말을 못해요. 먹지 못해 나올 수 없는 애, 옷과 신발이 없어 학교에 안 나오는 애, 나무 하러 산에 간 애, 부모가 장사하러 가서 집을 지켜야 하는 애…. 이유는 달라도 헐벗고 굶주리고 있다는 본질은 같았죠.”

학교에 겨우 데리고 나와도 문제였다. 학교에서 각종 물자를 내라는 요구가 끝이 없어 학생들은 억지로 왔다가 또 도망쳤다. 사실상 교육 시스템이 붕괴된 상태였다.

선생 생활에 회의감이 들 무렵 옆집 친구가 사라졌다. 한국에 먼저 간 딸이 고향에 남아있는 엄마와 남동생 두 명을 한꺼번에 데리고 간 것이었다.

이러저런 상황을 거치며 조 씨도 중국과 한국을 건네다 보기 시작했다.

“가까운 대학 때 친구가 있었어요. 그는 출신성분이 좋다는 이유로 보안서에 들어가 젊었을 때부터 승승장구를 했죠. 성분이 나쁜 저는 평생 이 생활에서 벗어날 것 같지 않다는 절망감이 들 때 두만강 저 건너편을 보니 저긴 뭔가 새로운 세상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출신성분의 굴레에 묶여 평생 국경지역을 돌며 음악교사를 전전하는 인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가난한 학생들을 그만 괴롭히고 싶었다.

그는 몰래 중국 휴대전화를 구입해 중국과 연락하며 장사를 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런데 밑천이 없는 그에게 장사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2003년 9월 중국에 친척이 있다는 마을 여인 4명을 모집해 두만강을 넘었다. 그때만 해도 가정이 있는 터라 탈북을 한다는 것보다는 중국에 가서 돈을 마련해 오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첫 원정은 실패였다. 중국의 친척들도 도와줄 형편이 못됐다.

그런데 그 일이 1년도 더 지난 2004년에 꼬리가 밟혔다. 온성군에 닥친 집중검열 과정에 당시 함께 중국으로 도강을 했던 여성 한 명이 체포돼 그의 이름을 분 것이었다.

그해 12월 그는 수업 중에 체포됐고 일주일 동안 감금됐다. 제 발로 돌아왔기 때문에 바로 감옥에 보내진 않고 일주일 동안 조사만 한 뒤 집에 돌려보냈다.

가뜩이나 출신성분이 나쁜데 중국에 몰래 갔다 온 경력까지 더해지면 인생이 뻔했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일이긴 했지만, 교단에서 학생들에겐 조국에 충성하라고 말할 자신도 없었다. 게다가 보안서 연줄을 찾아 알아보니 “지금은 조사할 사건이 많아 괜찮지만, 집중 검열이 마무리되면 교원에서 해임돼 1년 교화 또는 최소 6개월 노동단련대에 보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을 들었다.

결국 그는 탈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국에 간 옆집 친구를 수소문해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2005년 1월 5일 조 씨는 모친과 아내, 4세 딸까지 데리고 두만강을 넘었다.

친구가 탈북 루트를 잘 알려줘서 한국까지 오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1월 5일에 떠나 불과 두 달 뒤인 3월 8일 한국에 도착했는데, 이렇게 빨리 입국하는 것은 희귀한 경우였다.

조 씨는 “지금까지도 한국에 온 것을 한번도 후회하진 않는다”며 “평생 거짓말을 하고 살아야 할 선생이란 직업에서 해방돼 너무 좋고, 딸에게 미래를 줄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도돌이표 정착
한국에서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북한의 음악교사가 한국에 와서 같은 전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조 씨도 당장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라 음악을 생각할 처지가 아니었다. 음악만 해온 인생은 31세에 끝내고, 한국에선 새로운 인생을 찾아야 했다. 2006년에 아들이 또 태어났다.


대전에 정착한 뒤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우유, 신문, 치킨 등 배달 서비스에서 시작해 청소업 등 몸으로 때울 수 있는 일은 거의 다 해봤다. 1년 정도는 한 탈북자 정착지원 민간단체의 요청으로 입원이 필요한 탈북민을 상담해주는 일도 했다. 물론 월급은 쥐꼬리만했다.

도무지 가난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급기야 함께 탈북해 온 아내마저 4년 만에 “한국에 와서 사우나조차 못가고 살았는데, 당신과 살아봐야 희망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갔다. 이런 처지에서 남을 상담하는 일을 하는 것이 부끄러워 상담사직을 뿌리치고 도망치듯 경기도로 옮겨왔다. 광명과 인천 등지를 전전하며 열심히 직업을 찾은 결과 경기도청에 시간제 계약직원으로 들어갔다. 하루 6시간 일하고 1800만 원의 연봉을 받는 직업이었다.

“제가 인천에 살았는데, 경기도 의정부 북부청사까지 매일 출퇴근을 했습니다. 왕복 90㎞를 오가야 했는데, 기름값이 한 달에 40만 원이나 드니 차를 타고 다닐 형편은 못돼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토바이를 타고 인천에서 의정부까지 출퇴근했지만, 결국 이 직업도 1년 만에 그만두었다. 월급이 적은 이유보다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 도청에서 일하면 탈북민 사회를 위한 정책 제안 같은 것을 할 수 있을 줄 알았죠. 그런데 가보니 시간제 계약직원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더군요.”

아무리 열심히 산다고 생각해도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결국 해외에도 눈을 돌렸다. 2013년경에 탈북민들 속에선 해외에 나가는 붐이 일었다. 한국에선 희망이 없으니 해외에 나가 영주권을 받고 살면 자녀의 삶이라도 달라지지 않겠는가는 기대 때문이었다. 물론 해외 생활이라고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외국으로 간 탈북민들을 만나 물으면 “한국에선 탈북자란 딱지를 죽을 때까지 떼지 못하지만, 해외에 나간 순간 진짜 코리안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대답이 많다. 외국에 나가면 더 이상 ‘노스’니 ‘사우스’니 따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디 출신이든 해외에선 똑같은 ‘이방인 코리안’이 된다. 탈북민들은 일반적으로 동등한 코리안으로 차별 없는 대접을 받는 것에 무척 큰 의미를 부여한다.

조 씨도 캐나다로 갔다. 2년을 버텼지만, 한국에서 간 탈북민에겐 끝내 영주권을 주지 않았다. 불법체류도 한계가 있었다. 다시 쫓기듯 한국으로 돌아왔다.

새 삶을 기약하며 어렵게 마련한 스카이차를 운전하는 조광호 대표. 조광호 대표 제공


# 애솔의 삶
2015년 그는 또다시 출발선에 섰다. 한국에 온지 10년 됐지만, 여전히 안정적인 일자리는 없었다. 재혼한 아내와 두 자녀까지 먹여 살리려면 일은 해야 했지만, 괜찮은 일자리는 그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게다가 2016년에 새로 막둥이까지 태어나 자녀가 셋이나 됐다. 다섯 가족을 부양하느라 아무리 힘든 일도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는 그를 눈여겨보던 지인이 ‘스카이’로 불리는 ‘고소작업차’를 해보라는 제안을 해왔다. 기술을 배우고 돈을 벌면 독립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 업체에 들어가 월급 180만 원을 받으며 1톤 스카이차 기사 생활을 시작했다. 욕도 많이 먹으면서 6개월 동안 버티니 기술도 배우고 자신감도 생겼다. 기술이 높아지니 다른 업체에 3.5톤 스카이를 운전하고 월 250만 원을 받기로 하고 이직도 가능했다. 한국에 와서 10년 넘게 월급 150만 원 언저리를 맴돌다가 250만 원씩 받게 되니, 드디어 인생의 직업을 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3.5톤 트럭을 6개월 한 뒤 그는 월급 280만 원을 받으며 5톤 스카이차 기사로 옮겨갈 수 있었다. 많이 벌 때는 월 300만 원도 벌었다.

조 씨는 42세가 돼서야 드디어 인생의 직업을 찾았다는 생각을 가졌다. 스카이차는 작업자들을 정확한 높이와 위치에 올려주고, 작업 진행에 맞추어 다음 장소로 정확하게 옮겨주어야 한다. 그는 음반을 누비던 섬세한 손가락의 감각으로 외벽과 창문이 파손되지 않도록 탑승대를 부드럽게 조종해 이동시키며, 선율의 속도와 강약을 조율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능숙하게 작업자들과의 협업을 지휘한다.

조 씨는 1년 넘게 기사로 일하다가 2017년 2월 다른 스카이 기사들이 하는 대로 독립을 했다. 1억8000만 원짜리 5톤 스카이 차량을 할부로 구입했다.

‘일조스카이’라는 회사도 만들었다. 비록 자영업자이지만, 처음으로 회사 대표 명함도 갖게 된 것이다. 그해엔 건설경기가 좋아 일감도 많았다. 한달에 1500만 원을 벌 때도 있었다.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나서 일했다.

그러나 2018년부터 건설경기가 좋지 않았다. 그해 번 돈은 전해의 3분의 2 수준이었다. 2019년은 다시 수입이 줄어 2017년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코로나19로 침체된 작년 하반기에는 다시 수입이 재작년의 반으로 줄었다. 스카이를 처음 시작했던 2017년에 비하면 수입이 25%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 정착 15년차에 그가 얻은 교훈은 단 하나였다.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경과 고난 속에 다져진 자신감도 있었다.

“정면으로 부딪쳐 보자. 이 많은 스카이 기사들이 다 장사가 안 된다고 그만둬도 워낙 고생을 많이 해본 나는 쥐꼬리만한 수입에도 오랫동안 버틸 자신이 있다.”

모두가 아우성일 때 조 씨는 1톤 스카이차를 9월에 또 사들였다. 5톤 스카이차는 30m까지 작업이 가능하지만 그만큼 비싼 단점이 있고, 1톤 스카이차는 18m 정도밖에 작업하지 못하지만 가격이 싸기 때문에 주문을 더 받을 수 있었다.

차 두 대를 사고 나니 거짓말처럼 갑자기 일감이 밀려들었다. 단 4개월 사이에 올해 8개월 번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

스카이 차량 업계도 경쟁은 치열하다. 서울·경기권에만 5000여대의 스카이차량이 있다. 이 업계는 고공 작업자들이 일감을 받아 스카이차를 부르는 구조다. 작업자가 함께 일해 본 기사에게 만족해야 또 찾아주는 것이다.

또 이권도 엄연하게 존재한다. 일을 하러 갔는데 한국노총이나 민주노총에 가입된 기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작업장에서 내쫓긴 적도 많다.

그럼에도 조 씨는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자신감이 넘치고 행복한 시기라고 했다. 사업 노하우도 이제는 충분히 쌓았고, 거래처도 많이 생겼다.

2017년에 구입한 5톤 트럭 할부금도 올해는 다 갚을 수 있다. 할부가 끝나 이제야 겨우 내 차가 됐지만 그는 이 차를 다시 중고로 팔아야 한다. 장비연식규제 때문이다. 5년이 넘은 노후차량은 상성이나 현대 등 대기업 작업 현장에는 아예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열심히 번 돈으로 임대주택을 졸업해 빌라이긴 하지만 다섯 식구가 살 수 있는 보금자리도 마련했다. 한국에 올 때 4살 밖에 안됐던 딸도 이제는 20살이 돼 곧 고등학교를 졸업해 대학에 가게 된다.

고된 하루 일을 끝마치고 집에 들어갈 때 그는 가장 행복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집에 들어서면 박수쳐주는 가족이 있어 그는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한다.

조 씨의 삶은 한국에 온 3만4000여명의 탈북민 중에서 그리 특별하다고 보긴 어렵다. 북한에서 특이한 경력과 사연을 갖고 산 것도 아니고, 탈북 과정에 북송 등을 거치며 고초를 겪은 것도 아니다. 한국에 와서도 10년 넘게 제대로 잡지 못하고 떠돌았다. 몇 년 전 시작한 장비업으로 아직 큰 돈을 번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한국에 온 대다수 탈북민들과 마찬가지로 바위산에 뿌리박고 자라는 애솔과 닮았다. 소나무에서 떨어져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거친 바위산을 굴러다니던 솔방울이 마침내 뿌리를 박을 곳을 찾고 줄기를 키우는 것이다. 푸르고 굳센 소나무의 연륜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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