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가 된 탈북병 “총은 버려도 옷은 못벗는다 버텼죠”[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주성하기자 입력 2021-01-15 14:00수정 2021-01-15 19:43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군사분계선을 넘어 한국으로 귀순한지 19년 만에 대학 전임교수가 된 주승현 박사. 2017년 12월 신동아 인터뷰 때 찍은 사진이다.
2002년 2월 20일 동아일보 기사.
도라산역 인근서 북한군 1명 귀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비무장지대(DMZ) 인근 경의선 도라산역을 방문하기 불과 10여 시간 전인 19일 밤 소총 등으로 무장한 북한군 병사 1명이 서부전선으로 귀순, 군 당국이 귀순 경위를 조사 중이다.

국방부는 20일 “북한군 주 모 상급병사(22)가 19일 오후 11시18분경 경의선 남측 최북단 도라산역 부근인 경기 파주시 장단면 도라산리로 귀순해와 관계당국에서 합동신문 중”이라고 발표했다. 국방부에 따르면 북한군 병사는 인민군 방한복 차림에 AK 소총과 탄창 5개를 휴대하고 있었으며, 도라산역 남서쪽 1.2㎞ DMZ를 통해 귀순했다.

이 병사는 DMZ에 들어서면서 귀순 사실을 알리기 위해 공중을 향해 7발을 쐈으며, 한미 양국 대통령 방문을 앞두고 비상경계 중이던 아군 초병이 총성을 듣고 열상관측장비(TOD)로 확인해 안전하게 유도했다고 군은 설명했다.

주요기사
북한군 병사는 조사에서 “부시 대통령이 방한했다는 얘기는 들었으나 도라산역에 오는 일정은 몰랐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 당국은 한미 양국 대통령의 도라산역 및 전방 미군부대 방문에 따른 경호 문제 등을 고려해 북한군 병사의 귀순 사실을 20일 오후에야 공개했다. 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 탈북
2002년 2월 19일 저녁 10시 반경. 서부전선을 지키는 북한군 2군단 6사 소속 민경대대 심리전 제압방송국 안에선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때를 기다리던 방송국 조장 주승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무기고를 열었다. 탈북을 위해 소대장과 정치지도원, 보위지도원 등 장교들을 방송국으로 초대해 이른 저녁부터 술과 음식을 아낌없이 먹였다. 초소 당직자들도 함께 마셨다. 주 씨도 함께 마시는 척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마침내 술에 취한 모든 이들이 잠에 들었다.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무기고에서 자동소총과 탄약 150발이 든 탄창 5개, 수류탄 등을 꺼낸 그는 방송국 문을 열었다. 찬바람 속에서 숨을 길게 내쉰 뒤 매복호(잠복호)를 넘어 전기철조망으로 달려갔다. 북한의 전방 철조망은 50㎝ 정도 사이를 두고 4개가 설치돼 있다. 각각 1만 볼트(V), 6000V, 3000V, 2000V의 전기가 흐른다.

주 씨는 미리 봐두었던, 철조망 하단 콘크리트가 깨진 곳을 찾아낸 뒤 제일 멀리 있는 전기철조망을 향해 ‘접지봉’을 던졌다. 접지봉은 고압 전류를 합선시켜 약 2분 정도 전기를 차단시킨다. 요란한 불꽃과 굉음과 함께 빨갛게 달았던 철조망 4개가 몇 초 뒤 꺼멓게 죽었다. 주 씨는 미리 준비했던, 철조망을 들어 올릴 때 쓰는 Y자형 ‘짝지발’을 이용해 전기철조망을 차례로 통과했다. 철조망 다음은 500m 정도 넓이의 지뢰구역이었다. 망설일 수가 없었다. 전기철조망 전기가 차단되면 자동으로 비상이 걸려 5분 내로 군인들이 추격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뢰를 밟고 말고는 하늘의 뜻에 맡기고, 앞에 보이는 국군 소초(GP)를 향해 내달렸다. 한참을 달리다 선에 걸려 넘어졌다. 발목에 감긴 선을 풀며 보니 말뚝지뢰였다. 설치한지 오래됐는지 터지지는 않았다. 천운이었다.

다시 내달렸다. 5분도 안 돼 북한군 초소 쪽에서 사이렌이 울리고 총소리가 들렸다. 북한군 적외선 탐지초소에 발각됐는지 총알이 정확히 날아오는 느낌이었다.

기를 쓰고 달렸다. 군사분계선에 도착한 그는 허공에 연발로 총을 쐈다. 귀순자가 있으니 총을 쏘지 말라는 신호였다. 냅다 달려 한국군 GP까지 도착했지만, 그곳을 지나쳐 뒤쪽 일반전초(GOP)를 향해 내달렸다. 북한군 추격조가 비무장지대 내에선 분계선을 넘어 한국군 GP까지 오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실제로 당시 북한군 추격조가 한국군 GP까지 왔다고 한다.

한참 달리니 남방한계선 철책이 나타났다. 방송국을 떠나 얼추 20분 정도 걸린 듯했다. 북한군이 총을 난사하고, 자신도 총을 쏘며 달려왔으니 국군 병사가 마중 나와 있을 줄 알았지만 누구도 없었다. 철책은 뛰어넘을까도 생각했지만, 그러다 사살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포기했다.

그는 철책을 따라 200~300m 정도 거슬러 올라갔다. 오랜 전방 경험상 매복초소가 있을 만한 곳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그는 철조망 기둥을 군화로 찼다. 한참을 찼는데도 반응이 없었다. 화가 나 더 힘껏 한참 찼더니 그제야 국군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국군 병사는 총을 겨누고 “누구냐”고 물었다.

“저기 앞에 북조선 민경초소에서 왔습니다.”

그러자 “무기를 버리고 옷을 벗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무기는 버릴 수 있지만 군복은 벗을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전방에서 근무하다보면 한국에서 날아오는 삐라를 엄청 많이 봅니다. 한번은 과거 우리 부대에서 귀순한 병사의 사진이 삐라에 실려 왔는데, 내복만 입고 후줄근한 모습이더군요. 아마 귀순 즉시 찍은 사진 같았습니다. 옷을 벗으란 말을 듣자 저는 ‘내 모습도 내복차림으로 찍혀 북한에 삐라로 뿌려지면 어쩌지’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목숨 걸고 넘어왔는데 그런 모습으로 옛 전우들에게 보여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뒤에서 추격조가 당장 달라붙을까봐 정말 불안했지만, 끝까지 버텼죠.”

북한군 엘리트 군인의 자존심으로 “무기는 버려도 옷은 벗지 못 하겠다”며 버티자 한국군이 결국 양보했다. 절단기를 가져다 철책을 뜯고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군 당국은 기자들에게 “비상경계 중이던 아군 초병이 총성을 듣고 열상관측장비(TOD)로 확인해 안전하게 유도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주 씨는 “마중 나온 사람도 없었고, 철책을 따라 한참 올라가 스스로 매복초소를 찾아 군화발로 자고 있던 군인들을 깨웠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렇지만 분계선에서 마주보며 근무를 섰던 같은 군인의 처지에서 그들이 불이익을 받을까봐 걱정돼 지금까지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그가 넘어온 지역은 도라산역에서 불과 1.2㎞ 떨어진 곳이었다. 그 곳에는 10시간 뒤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의 방문이 예정돼 있었다. 그런 곳에서 총성이 울렸으니 군이 발칵 뒤집힐만한 사건이었다.

# 민경부대에 입대하다
북한의 대남심리전의 최전방에 서 있던 주 씨가 탈북한 것은 가정에 닥친 불행, 한국에 대한 동경 등 복합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는 198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공군부대 군관이었고, 태어날 당시 모친도 같은 부대 군관이었다. 부모 모두 군관인 가정에서 태어나 군부대 가족 마을에서 자라다보니, 학교를 마치고 군에 가서 군관이 되는 것이 주 씨의 자연스러운 포부가 됐다. 그래서 학교 때 공부보다는 국방체육 같은 운동에 더 열심이었다.

군에 간다고 해도 공군은 절대로 가기 싫었다.

“북한군 육군의 견장은 빨간색 바탕이고, 공군은 파란색 바탕입니다. 그런데 공군 병사들이 도시에 나가면 육군에게 자꾸 얻어맞고 와요. 공군 병사들이 약하다고 인식하는 거죠. 그래서 공군 병사들은 외출 나갈 때 빨간 견장으로 바꿔달고 나갑니다.”

2019년 한 방송사 프로그램에 출연해 분단과 통일에 대한 강연을 진행하고 있는 주승현 교수.


원래 공군 군관 가족은 자식들도 공군에 보내는 것이 전통이다. 주 씨가 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몇 년 동안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겪었다. 시내로 나가면 굶어죽은 시신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주 씨의 공군부대 마을은 국가 공급이 그럭저럭 이뤄져 배는 곯지 않았다.

1997년 군에 갈 시기가 다가왔다. 북한은 전방 민경대대, 비행사, 잠수함 승조원, 호위국을 ‘특수병종’으로 구분하고, 학교를 돌며 출신성분과 체력조건 등을 심사해 일반 병종보다 먼저 모집한다. 성분도 좋고, 체격도 좋은 주 씨는 특수병종 입대 대상자가 됐다. 주 씨는 가장 혹독한 훈련을 하는 민경에 가고 싶었다. 부모들은 공군에 가야 나중에 대학 갈 때 힘을 써줄 수 있다고 주 씨를 설득했지만 ‘강한 사나이’가 되고 싶었던 주 씨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부친이 결국 손을 들었다. 대신 조건을 달았다. 2군단 민경에 가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가보니 부친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전방에 주둔한 북한군 1,2,4,5군단 민경대대 중 개성을 끼고 있는 2군단 민경만이 ‘도시민경’으로 불렸다. 깊은 산속에 주둔한 다른 군단 민경부대는 ‘산골민경’이라 했다.

민경 신병훈련소는 일반 신병훈련소보다 기간이 두 배 긴 1년 과정이었다. 철봉, 격술, 사격 등 일반 병사들보다 혹독한 훈련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더 잘 먹이는 것도 아니고 공급은 일반 보병훈련소와 똑같았다.

신병훈련소를 마칠 무렵 인사참모가 그를 찾더니 어느 보직으로 가고 싶으냐고 물었다. 입대할 때 주 씨는 조국통일의 성전(聖戰)에 가장 앞장서는 최전방 부대에서 강한 군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훈련소 생활을 거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막상 가보니 민경부대의 전투력은 제 생각보다 훨씬 떨어졌고, 군관들은 먹고 사는데 급급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최전방 경비병이 되겠다는 생각을 접고 무전병으로 보내달라고 인사참모에게 말했습니다.”

인사참모는 고민에 빠졌다.

“그거 부탁자들 자리인데….”

부탁자는 특별히 봐주라고 지시가 떨어진, 한마디로 ‘빽’ 좋은 간부 자식들을 의미한다. 개성의 2군단 민경에는 고위 간부들의 자식들이 많이 입대했다. 당시 간부들이 잘못을 저질러도 자식이 최전방 민경에 있으면 한번은 봐주라는 지시가 하달됐을 때였다. 또 민경에 있으면 노동당 입당이 빠르고 제대한 뒤 출세도 탄탄대로였다.

일반 인민들의 자녀들은 당시 13년을 군복무해야 했지만, 고위 간부들은 자녀들을 5~6년 정도 복무시켜 입당시킨 뒤 ‘위탁생’이란 이름으로 제대시켜 대학에 보냈다. 위탁생 제도는 군에서 사회대학에 위임해 교육을 시키는 제도인데, 사실은 고위 간부들이 자녀들을 일찍 제대시켜 간부로 키우기 위해 만든 특권 제도였다. 힘없는 집 자녀들이 13년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할 때 쯤, 고위 간부 자녀들은 그 기간 군 복무 경력과 대학 졸업, 노동당 입당 등 모든 자격을 갖추고 간부가 돼 있었다.

민경에선 무전병이 ‘부대의 꽃’이라고 불렸다. 가장 ‘꽃보직’이란 의미였다. 민경소대는 일반 부대와 달리 장교가 셋이 있었다. 소대장, 정치지도원, 보위지도원이 장교였는데, 무전병은 항상 이들 장교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편한데다 간부의 신임을 받기 쉬워 입당도 빨랐고, 일반 대학과 군관학교 추천도 잘 된다. 그래서 아들을 민경에 보낸 고위 간부들은 부대에 부탁해 무전병 보직을 달라고 요구했다.

난감해하던 인사참모는 그를 잘 보았는지 결국 무전병으로 임명해주며 “내가 쓸 자리를 너에게 준다”며 엄청 생색을 냈다. 주 씨의 아버지가 공군 장교인데다 그의 친척들도 군에서 고위급이 많았던 덕을 본 듯했다. 주 씨 역시 입대할 때 아버지가 5년만 군 복무를 하면 군관학교에 보내준다고 약속했다.

“무전병이 되니 인사참모는 왜 그렇게 생색을 냈는지 알겠더군요. 우리 대대 무전병 중 제가 제일 힘이 없었어요. 저 다음에 힘이 없는 무전병이 김격식 당시 2군단장 조카일 정도였으니까요. 제 선임병이 강원도 2인자인 조직비서 아들이었는데, 저는 제대할 때까지 이 친구 얼굴을 본적이 없어요. 몸이 아프다고 집에 가 있는데 대신 1년에 두 번 수산물을 실은 트럭을 부대에 보냈어요. 이 친구는 끝내 부대에 나타나지 않고 버티다가 몇 년 뒤 위탁생으로 김일성대에 가더군요.”

그가 배속된 2군단 6사 민경대대는 판문점에서 임진강까지를 관할로 두고 있다. 그 안에 개성공단도 있다. 민경대대는 1800명으로 사실상 연대급이었다. 그래서 민경대대장은 계급과 대우도 일반 부대 연대장급 대우를 받는다.

민경대대는 15개 초소를 지키는데, 1개 초소에 1개 소대가 들어가 두 달간 전방에서 근무한 뒤 후방의 다른 부대와 교대한다. 민경 소대는 45~50명으로 일반 부대보다 많은데 소대마다 무전병이 있다.
#기정동 대남제압방송국
주승현 교수는 기회가 날 때마다 판문점을 찾아가 자신이 근무했던 북쪽땅을 바라본다. 2019년 임진각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서 통일을 기원하며 학생들이 써놓은 글을 읽어보는 주 교수.



주 씨의 첫 근무지는 개성시 판문군 판문점리였다. 한국에는 개성시 평화리 기정동으로 알려져 있다. 높은 철탑에 커다란 인공기가 펄럭이는 마을이다. 기정동 맞은 편 한국 지역이 역시 큰 태극기 철탑이 있는 대성동이다. 기정동과 대성동은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 원래 강릉 김씨 집성촌이었다. 그러다 정전협정으로 평화로운 마을이 둘로 갈라졌고, 친척들이 영영 보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공산주의 선전마을이 된 기정동은 농사를 지으면 3년을 먹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땅이 비옥한 마을이었다. 그렇지만 1년 소출을 국가에 바치고 나면 농민들이 먹고 살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기정동은 또 집집마다 문을 잠그지 않고 사는 북한에선 보기 힘든 동네였다. 민경군인 외의 외지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도둑맞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민경군인도 이 지역에서 뭘 훔치면 바로 탄로가 나기 때문에 민가를 습격하지 않았다.

주 씨가 처음 기정동에 가니 감시망루에서 분계선 남쪽지역까지 거리가 딱 10m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남쪽 지역은 철조망을 따라 도로가 쭉 깔려 있었다. 이곳에서 3년 정도 병사로 근무하다보니 무전병보다 더 좋은 ‘꽃보직’이 눈에 띄었다. 바로 대남 제압방송국이었다.

주 씨의 민경대대에는 3개의 대남방송국이 있었는데, 이들은 3가지 임무를 수행했다.

우선 제작된 대남방송을 남쪽에 확성기로 쏘는 역할을 했고, 두 번째는 인근 부대와 마을에 3방송이라 불리는 내부 유선방송을 전송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이런 임무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한국의 대북확성기 방송을 제압하는 일이었다. 한국의 확성기는 출력이 좋아 북한 깊숙한 곳까지 소리가 도달한다. 그래서 북한은 대북확성기 방송에 대응해 대남확성기 방송의 출력을 최대로 높여 방송한다. ‘소리로 소리를 제압한다’는 의도였다.

대남방송국은 정원이 15명 정도였지만, 실제 소속 대원은 늘 정원의 2~3배였다. 방송국에 최고위 간부의 자녀들인 ‘부탁자’들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편하게 군복무를 하고 5년 안에 대학을 추천받아 사라졌다. 최전방 민경군인은 대학 입학이나 승진 등에서 일반 제대군인보다 훨씬 높은 점수를 받는다.

무전병에서 제압방송국으로 옮기는 것은 대대 당위원회에서 결정해야 한다. 주 씨는 3년 동안 장교들과 어울리고 심부름을 다니는 무전병 생활을 십분 활용해 대대장과 대대 정치지도원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2000년에 방송국으로 옮겨갔다. 1년 뒤에는 4명의 대원을 부하로 둔 제압방송조장이라는 보직도 맡게 됐다. 이제 2년만 편하게 지내다가 아버지가 힘을 써줘 군관학교에 가면 됐다.

#절망 속에 찾은 길
2001년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청천벽력 같은 전보가 날아왔다. 공군 부대에 상급 기관의 집중 검열이 시작됐는데, 부친은 엄청난 강도의 조사를 받고 집에 돌아온 뒤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휴가를 받고 집에 갔다 온 뒤 주 씨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북한에서 조사 중 사망했다는 것은 출신 성분에 노란딱지를 받았다는 의미다. 아버지가 없으면 군관학교의 꿈도 날아갔다는 것을 뜻했다. 북에선 더 이상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절망에 빠지자 남쪽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엔 나의 새로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그는 최전방, 특히 한국과 가장 가까운 기정동에 있으면서 그동안 남쪽에 대해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

처음 왔을 때 남쪽 자유로에 차가 너무 많아 놀랐다. 북한에선 부대로 오는 군용차를 어쩌다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남쪽엔 차들이 줄지어 다녔다. 정치지도원에게 “저긴 왜 저리 차가 많은가”고 물었더니 “남조선은 서울에서 부산이나 대전 같은 남쪽으로 차를 타고 가려면 대북심리전을 위해 반드시 분계선 앞쪽으로 에돌아가게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계속 남쪽만 감시하는 병사가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맑은 날엔 멀리 북한산과 김포공항에 이착륙하는 비행기도 보였다.

벌거숭이가 된 북한의 산과 나무가 울창한 한국의 산도 인상이 깊었다. 저긴 전기도 풍부하고, 나무도 많고, 차도 많은, 잘 사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 남쪽에 대한 동경이 생겼다.

기정동엔 온갖 삐라가 수북하게 쌓였다. 삐라를 회수하는 것도 민경 대원의 일과였다. 처음엔 “남조선 괴뢰들이 삐라에 독을 발라 만지면 손이 썩는다”는 거짓말을 믿고 삐라만 봐도 손이 떨렸다. 하지만 나중엔 일부러 찾아보게 됐다. 삐라 내용과 그가 직접 눈으로 건네다 보는 한국의 실상은 일치했다.

미래가 보이지 않게 된 그는 오랜 고민 끝에 남쪽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적절한 날짜를 2002년 2월 19일로 잡았다. 2월 16일은 김정일 생일로 3일 동안 비상근무 체제에 돌입하게 된다. 비상근무가 풀리는 날인 19일은 그동안의 긴장이 풀어져 초소 장교들이 술도 마시고 일찍 잠에 든다는 것을 감안했다.

그는 이날을 위해 술과 기름진 음식을 잔뜩 준비했다. 방송조장이 한 턱 낸다는 말에 간부들은 별 의심 없이 기뻐하며 마음껏 술과 음식을 먹고 곧 잠에 골아 떨어졌다. 그의 계산대로 된 것이다. 그는 남쪽을 향해 자신의 운명을 내던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 운명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인천대 통일통합연구원 교수로 재직하던 2019년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주승현 교수.


#민경 출신의 국회 몸싸움
2002년 6월 그는 하나원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다. 막상 와보니 ‘삐라에 속았다’는 생각에 ‘멘붕’에 빠졌다. 삐라 속에서 봤던 엄청난 포상금과 자유로운 삶은 존재하지 않았다. 군 귀순자이니 직업은 줄 거라는 기대도 산산이 부셔졌다. 중국을 거쳐 오며 어느 정도 사회를 알고 오는 다른 탈북민과는 달리 주 씨는 16세에 입대해 군에만 있다가 전혀 문화가 다른 곳에서 사회생활이란 것을 처음 하게 돼 충격은 더욱 컸다.

먹고 살기 위해 직업도 스스로 찾아야 했다. 하나원을 나온 다음 달 집 주변 주유소에서 일자리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일자리를 구했더니 ‘조선족이냐’고 물었다. 탈북자라고 하자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주유소 알바 자리도 얻지 못했을 때 너무나 절망했어요.”

그가 벼룩시장을 보고 찾은 첫 알바는 모텔 청소부였다. 그는 모텔이 뭔지도 몰랐다. 며칠 동안 일하다보니 너무 비참한 느낌이 들어 스스로 그만두었다.

“북한 동료들이 제가 남쪽에서 남의 잠자리 뒷정리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비웃겠어요. 내가 이러려고 왔나 싶은 생각이 들어 그 일은 절대 못하겠더라고요.”

여름이라 집 주변 수락산 정상에 물병을 메고 올라가 판매하는 일도 했다. 믿을 것이라곤 체력밖에 없으니 동네마트에서 물을 사 산에 올라 팔아서 차익을 남겼다.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9월에야 서울 종로의 한 일식집에서 알바자리를 얻었다. 배달을 하고 주방과 테이블을 청소하는 이 직업은 꽤 오래 버틸만했다.

청소를 하면서 이곳에서 성공하려면 대학을 졸업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탈북민 특례입학제도 덕분에 그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는 입학했다. 하지만 그동안 공부와 담을 쌓고 온 그가 영어와 수학 등을 따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름 열심히 공부했지만 첫 학기에 학사경고를 받았다. 탈북민의 학비는 정부에서 주지만 학사경고를 받으면 학비 지원이 끊긴다. 그는 방학에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알바를 했다. 알바 자리 하나로 돈을 벌 수 없어 밤잠도 자지 않고 2~3개 알바를 동시에 했다. 겨우 학비를 마련해 2학기 수업을 들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애쓰는 그를 눈 여겨 보던 일식점 사장이 3번째 학기 등록금 일부를 보태주면서, 이번에도 학사경고를 받으면 일본에 가서 식당을 하게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너무 고마웠다. 그러나 학사경고를 더 이상 받지 않아 대학에 다닐 자신감이 생겼다. 그는 대학 4년을 단 한 학기도 휴학하지 않고 마쳤다. 통일부 공무원이 “대학에 입학해 휴학 없이 졸업한 탈북민은 당신이 처음”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2007년 대학을 졸업한 뒤 외국을 경험하고 싶었던 그는 보증금을 빼 캐나다 토론토에 가서 6개월 동안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왔다. 한국에 오니 마침 총선 시즌이었다. 한나라당 모 의원실에서 보좌관으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왔다. 대학에서 배운 정치외교학을 드디어 쓸 수 있다는 생각에 국회로 갔다.

어느 날 국회 예산심의를 둘러싸고 여야 간 격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한나라당 지도부는 보좌진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군 출신 보좌관은 앞으로 나오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주 씨는 머뭇거렸다. 군 출신은 맞는데 북한군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모 당직자가 “그럼 어때, 무려 특수부대 출신이구만”하며 좋아하더니 열심히 싸우라며 그를 앞장세웠다. 북한군 민경부대 실력을 발휘하는가 싶었지만, 하루 만에 대치 상태에서 빠져나왔다. 그가 보좌하는 의원이 폭행당해 병원에 실려 갔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주 씨는 국회 생활에 회의감을 느꼈다. 이렇게 정치에 소모되기보다는 차라리 법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2009년 그는 연세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휴학 없는 질주는 이어졌다. 대학원 학비를 벌기 위해 중간에 롯데, 금호석유화학, 동양그룹 등 대기업에 입사해 관리팀과 인사팀 등을 거쳤다. 2011년 석사 학위를 따고, 연이어 다시 박사과정에 도전했다. 3년 만인 2014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 33세 박사. 탈북민 최연소 박사라는 기록을 세웠다.

#“콘라트 슈만은 되지 않을 겁니다”
1961년 8월 15일 20세 동독군 병사 콘라트 슈만이 철조망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고 있다. ‘자유를 향한 도약’이란 제목의 이 사진은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억유산에 등록됐다.



박사 학위를 땄지만, 꽁꽁 얼어붙은 남북관계 속에 일자리를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2014년부터 그는 시간강사 자리를 전전했다. 외래교수, 초빙교수, 강의전담 등 타이틀은 그럴듯했지만 그래봤자 비정규직 강사에 불과했다.

11개 대학을 전전하며 6년 동안 고생한 끝에 지난해 9월 부산 고신대에서 처음으로 북한과 통일, 남북관계 등을 가르치는 전임교수 자리를 얻었다. 탈북민이 한국 대학에서 전임교수를 하는 것은 모름지기 주 씨가 최초 사례인 듯하다. 최연소 박사, 최연소 탈북민 전임교수 등 화려한 경력을 쌓았지만 그의 한국생활 19년은 눈물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19년 만에 비로소 눈물 젖은 빵에서 졸업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

주 씨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경영학도 배우고 싶었다. 2018년 모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마친 뒤 지금 또 서울 소재 한 대학에서 경영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한국에 와 10년 넘게 공부해 박사와 교수가 됐는데 왜 또 이런 도전을 하는지 궁금했다.

“통일이 되면 통일학 박사의 쓸모는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북한에서 인적관리와 경영을 아는 전문가들이 필요할 거라고 봅니다. 통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경제적 통합이라고 생각되는데, 언제 통일이 될지 모르니 늘 대비하고 준비해야죠.”

과거 주 씨가 썼던 책이나 글에는 분노와 절망이 흘렀다. 목숨을 걸고 귀순했는데 삐라에서 봤던 것과 전혀 달리 거친 광야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인터뷰를 하면서 만난 주 씨의 표정은 평온해보였다. 한국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솔직히 과거에 고생도 많이 했고 박탈감도 많이 느끼긴 했지만, 한국에 온 것 자체는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보니 한국은 기회의 땅이란 말을 이제야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처음 와서 주유소에서 쫓겨났던 제가 대기업 인사팀에서 채용을 담당했고, 지금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출신 성분에 묶이면 아무리 인재라 해도 위로 올라갈 수 없는 북한과 달리 여기는 출신을 따지지 않는 것 자체가 위대한 사회라는 증거입니다.”

과거 고생 경험을 통해 최근에 한국에 온 탈북민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없는지 물었다.

“일비희비하지 말라고 얘기해주고 싶습니다. 저처럼 학사경고를 받아가며 시작해 박사까지 됐는데 요즘 한국에 오는 젊은 탈북민들은 재능도 많고 웬만하면 저보다 머리도 좋지 않을까 싶네요. 극복하지 못할 난관은 없다고 믿고 열심히 노력하면 길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청년이면 가능한 학문이든, 기술이든 상관없이 대학을 다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100세 인생 시대에 4년을 공부하는 것은 아깝지 않은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오래 전부터 탈북 청년들과 함께 모임도 만들어 친목도 다지며 늘 교류한다. 통일이 내일이라도 불현듯 찾아온다면 준비했던 자들에게 기회가 온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마음속에는 항상 콘라트 슈만이란 이름이 자리 잡고 있다.

1961년 동독에서 장벽을 세울 때 20세 동독군 병사 콘라트 슈만은 철조망을 뛰어넘어 서베를린으로 왔다. 그가 탈출하는 사진은 ‘자유를 향한 도약’이란 제목으로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억유산에 등록되기도 했다.

탈출 사진으로 전 세계의 신문 1면을 장식한 슈만은 베를린에서 영웅이 됐다. 그러나 독일이 통일된 이후인 1998년 57세라는 젊은 나이에 목을 매 자살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그는 동독에 가 가족과 만났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를 배신자라고 외면했다. 슈만은 가족의 냉대를 받고 우울증에 빠졌다. 자유를 향한 도약의 끝은 37년 뒤 자살로 마무리됐다. 인터뷰 말미에 주 씨는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저는 절대 콘라트 슈만은 되지 않을 겁니다. 통일이 준 선물이 비극이 된 사람이 아닌, 통일을 선물처럼 만들어가는 가치 있는 삶을 만들어나갈 겁니다.”

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0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
동영상